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 / Highly Sensitive Person
귀인 1에게는 저보다 먼저 사귄 이웃이 있었습니다. 둘은 단지 안에서도 가까운 동에 살며, 같은 월령의 아기를 키우는 전업맘이라서 친해진 케이스였습니다. 그래서 저까지 덩달아 그 이웃과 친해졌습니다. 이들은 공통의 육아 철학을 바탕으로 친분이 쌓인 케이스로, 우리의 어머니들이 하던 방식을 어깨너머로 본대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책을 보고 공부하면서 실전에 적용하는 식이었습니다.
귀인 1의 이 이웃이 바로 귀인 2였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제가 본 보통의 사람과 달랐습니다. 일단은 책을 정말 많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만났을 당시 두 돌이 돼 가던 자신의 딸아이 책이 대략 1천 권, 자신의 책도 수백 권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책들이 다 읽혔다는 거였습니다. 그녀는 딸아이가 그만 읽자고 할 때까지 책을 읽어 주었다는데, 새벽 4시까지 읽어주다 본인이 지쳐 잠든 적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서적은 육아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철학・과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는데, 더 더 놀라운 점은 그녀가 그 책들의 내용을 다 이해한 상태로 서로 융합하고 체계적으로 구조화하여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녀는 마치 제 어린 시절 만화에서 본 지구를 구하는 로봇을 만든 괴짜 박사님을 연상케 하는 천재였습니다. 오로지 연구에 몰입하기에 연구실은 온통 관련 책과 도구로 가득하고 연구 외에는 다른 생각은 하지도 않으며,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관련 답안을 척척 내놓는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집은 이 천권에 육박하는 책과 교구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집에 들어갈 때면 발 디딜 틈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녀가 육아를 포함한 가사를 하며 소화하는 지식의 양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제 머리로는 잠을 1분도 안 자야 가능할까 말까 한 정도였습니다. 단위 시간 내에 그녀가 이해하고 습득하는 방대한 지식의 양은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천재이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처음 우리의 접점은 육아였기 때문에, 저는 대개 육아에 대한 책 처방을 받았습니다. “얘가 갑자기 길바닥에 드러눕고 떼를 쓰지 뭐예요.”라는 사소한 수다에도, “아~ 이제 자아가 발달하기 시작하나 봐요. 그리고 언니랑 아이가 기질적으로 달라서 부딪치는 면도 있을 거예요. 이 연령별 유아 성장발달 사항이랑 기질에 대한 책을 보세요”하고 관련 책을 꺼내 주었습니다. “저는 남편이랑 같이 있으면 이상하게 아이에게 더 쉽게 화를 내게 돼요.” 그 사소한 한 마디에, 애착으로부터 감정 발달에 대한 심리서적을 골라 주었습니다. 그녀의 처방은 언제나 맞았고, 제 지식세계도 그녀의 안내를 받아 풍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류는 뛰어난 천재의 덕을 본다는 말을 실감하며 1년을 넘게 지낸 어느 날, 그녀가 장문의 톡을 보내왔습니다. 내용은 설문이었고 총 23개 문항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개의 경우에 해당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읽어보니 해당되지 않는 항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정도나 공포 영화에 대한 선호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머지 문항에도 개인차가 존재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면서, 링크를 걸어 주었습니다. 팟캐스트 중 4명의 지식인들이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넓고 얇게 파주는 <지대넓얕>이었고, 도서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을 가지고 책의 내용을 알아보고 각자의 지식에 기초해 토론을 하는 회차였습니다.
그 설문지와 팟캐스는 ‘지진’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난생처음으로 스무 살쯤에 대략 3초 정도, 집의 바닥이 흔들리는 지진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 겪는 진동임에도 불구하고 그 진동은 일개의 미물이 거부하거나 피할 수 없는, 일부가 아닌 큰 공간을 전체로 흔들 수 있는 거대한 에너지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겪어서 알지 않아도 압도되었습니다.
그 설문지와 팟캐스트를 접한 날, 저는 그 날의 그 압도감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때까지 나로 알던 내가, 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찰나의 통찰이 왔습니다. 어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을 괴롭힐 의도로 까다롭게 구는 의도적으로 나쁜 아이라는 억울함, 가진 능력에 비해 수줍기도 하고 예민하기도 해서 사회생활을 둥글둥글하게 하지 못하는 데다 감수성은 오지게 풍부해서 덜 떨어지는 바보 같은 면을 가진 몹쓸 사람이라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의 기원이 무지에서 나온 오해임을 알고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통찰은 앞으로의 내 인생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거대한 전환점임에 틀림이 없다는 알 수 없는 믿음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눈이 갔습니다. 지금까지의 육아서로는 이해되지 않았던 아들의 묘한 행동들이 마치 중대한 수수께끼를 푼 후 저절로 알아서 맞춰지는 마법 큐브처럼 착착착착 맞아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담으로, 책으로 모든 걸 배우는 천재인 그녀는 얼마 후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사 한 달 전, 여느 때처럼 그녀의 집에 놀러 갔는데 현관 문 앞에 아주 무거운 A4 용지 박스가 2개 있었습니다. 그것을 옮겨주니, 역시 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책은 무거우니 이사 가서 주문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라고 물었더니, “아~ 그거 이사에 대한 책이예요.”라고 그녀는 해맑게 대답했습니다. 그녀라면 너무도 수긍이 가는 대목이라서 “아! 그럼요, 이사 가려면 책부터 봐야죠.”라고 탈룰라급 태세 전환을 했습니다. 역시 범재는 천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그녀를 통해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