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에서 A급이 되고 싶어졌다.
"회사에서의 밤봇씨는 어떤 사람인지 잘 보고 있어요. 적응이야 원체 잘한 것 같고, 우리 팀의 큰 전력이 되고 있어요. 근데 나는 회사생활뿐만 아니라 사생활에서의 밤봇씨의 행복도 찾았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너그러우신 우리 팀장님과 두 번째 업무면담 시에 들었던 말을 인용하며 이 글을 시작하겠다. 언제나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서 그럴싸한 성과를 내면 '이대로만 해오길 바란다'는 말을 당연하게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내 사생활'에서의 행복을 처음으로 물어봐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감사했지만, 동시에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내가 좋아하는거? 그게 뭐였지?'
회사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일을 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의 길을 너무 열심히 걸어온 나머지 나는 나를 아는 데에는 실패했다.
초등학교 4학년, 신상명세서에 채워넣어야 하는 내용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이 언제나 장래희망이었다. 분명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소방서아저씨' 라던가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적어넣어도 부모님은 기뻐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내가 적어간 장래희망은 언제나 엄마의 손길을 거쳐 '외교관' 또는 '변호사'와 같은 지금봐도 아주 멋진 일을 하고 있는 전문직으로 변했다. 그 당시에 부모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인 나는 '좋은 것이구나'라고 생각해서 그대로 받아들이곤 했었다. 그 학습효과는 너무나도 대단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신상명세서를 받으면 장래희망에 기계적으로 '외교관'이라고 적어 내는 버릇이 생겼다.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넘어갈 때 수시로 대학을 적어넣을 수 있었던 조건이 되었던 나는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을 진행하게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어디를 쓸거냐는 이야기 대신 나에게 '사범대학'을 가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고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들로부터 꽤 많은 도움을 받은 나로서는 해보고 싶은 직업이었기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선생님은 학부모 면담을 진행하고자 우리 엄마를 소환했고, 학부모 면담 이후 나는 아주 지극히 일반적인 '경영학과'를 가는 것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대답했다.
"사범대보다는 경영학이 낫지."
"야, 취미랑 특기도 회사와 관련된 거 쓰면은 더 좋대."
취업을 준비할 때, 취미와 특기를 적는 란에 대해 스터디원에게 물어보니 돌아온 답변이었다. 원래 좋아했던 '노래'를 취미에 적어놓았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뉴스읽기'로 바꿨다. 내가 좋아하는 것 마저도 남이 좋아하는 것을 써야하는 상황이 조금은 의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을 해야했던 나는 그 사람들에게 맞추기 위해 대수롭지 않게 나를 지웠다.
그 이외의 프로세스도 비슷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합격자기소개서, 합격면접후기 등을 줄창 읽으며 카피했고 면접관이라면 어떤 답변을 좋아할 지에 대해 예상질문들에 대한 그럴싸한 답변들을 써내려갔다. 이런 과정이 반복이 된 이후에는 정말 별거 아닌 경험마저도 마치 대단한 성공인마냥 포장하고 그럴싸하게 많은 기여를 한 것처럼 써내려갈 수도 있는 제법 소설가가 되어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소설은 꽤나 누군가의 심금을 흔들만큼 괜찮았는지 결과는 합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취업을 했을 때에는 정말 모든 성공을 다 거머쥔 것 같았고, 주변사람들도 가족도 이에 대해서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이제 성공을 향한 여정은 승진을 제외하고는 끝인 줄만 알았다.
회사 생활에 이래저래 익숙해진지 2년이 지나고 나서 처음으로 팀을 옮겼다. 새로운 팀에 가서 첫 면담을 할 때에도 사실 회사생활은 3년차인지라 크게 긴장도 하지 않았고 어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팀을 바꾼지 두 달이 지나서 두 번째 면담을 진행했을 때, 생각보다 큰 통수를 맞아버렸다.
"회사에서의 밤봇씨는 어떤 사람인지 잘 보고 있어요. 적응이야 원체 잘한 것 같고, 우리 팀의 큰 전력이 되고 있어요. 근데 나는 회사생활뿐만 아니라 사생활에서의 밤봇씨의 행복도 찾았으면 좋겠어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나 조직의 행복에 초점을 맞춰서 움직였던 내가 처음으로 '나의 행복'에 대한 화제를 들었을 때에는 쇠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 마냥 어지러웠다. 그리고 그 상대가 내가 몸을 담고 있는 팀의 '팀장님'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이 발언에 대해 '나보고 팀을 옮기라는 말인가?'라는 위기감까지 갑작스레 느껴졌다. 다만 정말로 곧이 곧대로 있는 걸 물어본다는 팀장님의 표정에 약간은 당황도 하며 다음 멘트를 뱉었다.
"네 팀장님, 요즘 운동도 하고 있고 그래도 좋아하는 업무를 하면서 지내는 거라 행복합니다!"
그리고 내 대답은 또 남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
"음, 그렇다면 다행인데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으면 꼭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그 나이에는 했으면 좋겠어요. 회사에서 생활하는 시간도 길지만, 우리가 회사만으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니까요."
함의도 악의도 없는 정말 단순한 조언. 그 날은 운동도 가지 않았고, 집에서 하루종일 '내가 좋아하는 일'에 대해 곱씹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렸고, 취업을 하기만 하면 끝인 것 같은 내 인생에 '다음 단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처음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남'이 아닌 '나'를 위한 것임을 알았을 때에 계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멍해졌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은 뭘까?"
29년, 내가 살아온 인생 중에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 지 모르는 바보가 되어 있었다.
"하반기에는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따려고."
이런 고민을 두 달정도 한 뒤, 내가 갑작스럽게 동기들에게 건넨 말이었다.
"조주기능사? 왜 갑자기?"
"나 술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거 배워보고 싶어서. 내가 바텐더를 하고 그럴 건 아니지만, 배워보면서 집에서 홈바도 차리고 그러려고."
평소 나는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와인에 대해서도 좋아하는 와인 품종을 능숙하게 이야기할 만큼 '주당'으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이런 내가 술에 대해 내가 무엇인가를 해보겠다고 선언했을 때 일부 동기들은 취미 이상에서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고 신선하다고 좋아했으며, 자기들도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까지 하여 갑자기 하반기 조주기능사를 목표로 하는 스터디까지도 결성이 되어버렸다.
'술이 취미에요.'
이야기하면 우스갯소리로 받아듣고 소맥을 건네받던 20대 초반과는 달리 자본금이 있는 20대 후반에서는 이 이야기는 꽤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졌고, 어느덧 술에 대한 책을 구매하고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순간까지도 오게 되었다. 사뭇 아주 우스꽝스럽기도하고 동시에 설레기까지도 한 풍경이었다.
술을 좋아하고 나는 칵테일도 좋아하니 칵테일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보고 싶다는 어쩌면 이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된 조주기능사라는 화제가 생각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먹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지금 시작하는 것이 늦은 것도 아니고 허황된 것도 아니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진짜 대단한 것 중에는 뭘 해야하는지도 모르겠고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서 그냥 단순하게 맨날 하고 있고 내가 즐기는 술부터 해보려고."
그래서 갑작스럽게 이제 1주일 뒤부터 나를 비롯한 동기들은 술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하는 게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들어오면서 그 가도를 따라온 나는 그 끝에는 모든 걱정이 없는 낙원일줄 알았다. 그렇지만 그 끝에는 '니 인생'이라고 이야기하는 '내 삶'과 모든걸 책임져야 하는 '내'가 존재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매뉴얼도 나의 삶과 똑같은 정확한 레퍼런스도 없는 이 현실에서 사실은 지금 이게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게 맞을까하는 불안감 때문에 새로운 시작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다만 사실 돌이켜보면 남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이룩한 것이 몇 개 없었고, 남들이 원하는 것에 아예 인생을 맞춘 취업에서조차도 탈락한 회사도 너무 많았기에 이 정도는 시행착오가 될 수 있음을 이미 알아버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한다 생각하는 것을 하면서도 진정으로 내가 원했던 것을 찾기까지는 굉장히 많은 시행착오일 것이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의 길을 너무 열심히 걸어온 나머지 나는 나를 아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렇지만 이제 진짜 나를 찾아갈 온전한 시간과 약간의 자본력은 있으니, 시작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인정한다. 내 인생 내가 사는 거고 남들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데, 이제 이 학점은 좀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나름 남들이 이야기는 '인생'에서는 나름 성공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것도 뭔지 모르는 '나 영역' F의 실패자입니다."
오늘은 좀 웃으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실패자지만 이제 성공 좀 해보려고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