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 by 이한
도서관 신간 코너에 있는 책 중 눈에 띄어 빌려 왔다. 한양의 집값도 오늘날 강남 집값만큼 높았다더라, 과거 미두(쌀 선물) 시장에서 조선 개미들의 열기는 오늘날 코인 개미들의 ‘가즈아’ 못지 않았다더라는 이야기를 때때로 듣긴 했지만 각 잡고 자세히 읽어 본 건 이 책이 처음. 재테크라는 단어가 생긴 것은 비록 현대에 들어서지만 가진 것 없던 사람들이 부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더라. 그런 가운데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이 뜻밖의 일확천금에 눈멀어 인생을 조지는 사례가 종종 나오는 것도. 욕망이란 얼마나 무섭냐.
가볍게 읽기 좋은 재미난 역사서로 아주 좋았다. 작가 필력이 좋아 술술 읽히기에 심심할 때 틈틈이 읽기 좋은 책. 메모라기보다는 내가 기억하고 싶은 몇 가지만 적어두려고.
1. 임금의 눈밖에 나 귀양살이를 하던 정약용은 그렇게 한양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고 한다. 오늘날 지방 근무를 꺼리거나 서울에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이유가 ‘문화적 인프라 부족’ 같은 것들인데 과거에는 더 심했을 거다. 그런 생각들을 담아 두 아들들에게 쓴 편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은 (중국에 비해) 문명이 뒤떨어져서 한양에서 몇십 리만 멀어져도 원시사회다. 그러니 벼슬에 올라 권세를 날릴 때는 그리 좋지 않은 셋집을 구해 초연하게 살아야 하지만, 벼슬에서 쫓겨난 다음에는 어떻게든 한양 근처에 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잃지 않아야 한다.”
또 다음과 같다.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아직은 너희를 시골에 숨어 살게 하고 있다만, 앞으로의 계획인즉 한양에서 10리 안에 살게 하겠다”... 다만 정약용의 계획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으니.. 그는 귀양에 풀려난 후 경기도 광주 마현, 지금으로 치면 남양주시까지 올라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끝내 한양 10리(약 4~5km) 내에 살지는 못 했다.
2. 정약용의 사례에서 보듯 한양의 집값을 끌어올린 것은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부족한, 소위 공급난이었다. 오늘날 서울 시민들이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과거 한양은 지금보다 훨씬 작았지만 고층 건물을 올릴 수도 없을 테니 공급난이 대단했을 테다. 심지어 벼슬을 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온 지방의 유지들조차 서울에서는 셋방살이를 했어야 한다고 하는데, 한때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낸 퇴계 이황도 서울시립미술관 근처에서 셋집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나마 셋방을 구하면 참 다행인 거고 그조차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한양은 그야말로 ‘쪼개기’와 같은 난개발이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방 한 칸을 3칸을 쪼개서 빌려주는 악질적인 업자도 많았다고 하는데 그중에는 벼슬아치도 있었다고. 집주인은 참 좋았겠다 싶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단다. 악질 세입자들이 일단 방을 차지한 후 나가지 않는 것은 물론 집주인을 쫓아내는 ‘여가탈입‘도 종종 발생해 조정이 골치를 썩였다고. 심지어 양반들이 재산이 좀 있는 노비들의 집을 뺏는 사례가 많아서 집주인들이 방 빌려주기를 그렇게 겁내 했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무섭네. 오늘날이 전쟁이라지만 과거는 그야말로 정글이구나. 게다가 집값이 이러하니 생활물가는 말해 뭐할까. 웬만큼 출세해서야 서울 집 매수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고. 500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내 집 마련’이 이렇게 어렵다.
3. 왜 이토록 공급난이 심했느냐. 이유야 많겠지만 역시 한양이 ‘출세의 땅’이었기 때문일 테다. 조선 시대의 출세 길인 ‘과거 제도’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는데, 드라마를 보면 과거라는 게 마치 공부만 잘하면 급제할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오늘날 수능이나 취업을 생각해보자고. 지방러들은 알겠지만 이게 생각보다 정보 싸움에서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돈은 어떤가. 면접 한 번 보려면 교통비/숙박비도 적지 않게 깨진다. 조선 시대에는 더 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지방 사람들은 과거 한 번 치러 한양에 오려면 밥값, 방값으로만 적지 않은 가산을 탕진해야 했다. 웬만한 집안에서는 집안의 유망주에게만 기회를 줬을 테고 그 압박감과 기대감, 또 먼 길을 떠나 저하된 컨디션 속에서 과거를 치러야 했던 게 조선 시대 지방 양반의 삶이었던 거다. 한양에 방 한 칸만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을까.
4. 그렇지만 한양은 ‘가진 자들의 땅’이었고 서민들의 삶은 점점 고달파져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천에서 용은 났으니. 지금은 중구 인현동 을지로 3가 인근에 있던 빈민촌 마른 내에서는 구국의 영웅이 태어났으니. 바로 이순신이다. 그래 그 동네 이름이 충무로인 건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명보아트홀 앞에 보면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라는 표지석도 있다. 지금도 충무로는 부유한 동네라고 하긴 어렵긴 한데 이 동네, 뭔가 기가 좋은지 영웅들이 많이 살았다. 이순신은 결국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외가가 있던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를 가기는 하는데 떠나기 전 경상도 의성에서 살다가 공부하러 올라온 세 살 위의 형과 친해졌다. 바로 당대의 천재로 불리던 류성룡. 경상도 알부잣집 자식인 류성룡도 한양에서 방 구하기 어려웠는지 마른 내에 살았는데 지금의 대한극장 근처라고 하니 이순신 집이랑 한 10분 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의 친분은 징비록에 소소히 녹아 있다. 그런데 이순신의 주적(?)이라고 할 법한 원균도 마른 내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고 하니 재밌다. 또 이 세 사람이 마른 내에 살았던 사실은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이 ‘성소부부고’에 기록하며 알려졌다. 허균은 강릉 출신인데 아버지가 관직을 맡아 한양에 일할 때 마른 내에 살았던 모양이다. 충무로가 그랬구나.
5. 퇴계 이황 선생님은 워낙 훌륭한 선생님이셔서 아직도 지폐에 기려 존경받고 있지만, 그저 책만 판 선비가 아니라 ‘먹고사니즘’에도 굉장히 충실하셨던, 심지어 수완까지 좋았던, 훌륭한 가장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젊은 시절의 가난을 탈출하게 도와준 시드 머니는 비록 결혼한 아내의 집안에서 나왔지만 촘촘하게 일궈낸 것은 그의 힘. 예컨대 그는 부인들(두 번 결혼하심)이 가져온 재산(땅)을 두 배 이상 불려서 최대 3,000제곱킬로미터 규모까지 늘렸다고 한다. 어떻게? 매년 빡시게 농사를 지으면서. 목화 농사도 짓고 당시 법으로 금지됐긴 했지만 효율은 무척 좋았던 이앙법도 도입하면서. 게다가 이황은 노비 관리도 잘하고 영수증 관리도 잘하고 근검절약하기까지 했는데 심지어 세금도 잘 내고 친척일가도 잘 걷어 먹어 살렸다고 한다. 유능한데 양심적이기까지. 매년 고위 공직자들 재산 공개 보면 아주 드물게 일도 잘하고 재테크도 정말 정석으로 알뜰히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감탄을 자아내던데 이황은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돈을 벌면서도 선비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은 것은 말해 무엇하랴. 아들에 보낸 편지는 이렇게 쓰고 있다.
“가산을 경영하는 일은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너의 아비는 평생 비록 이런 일에 서툴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어찌 완전히 하지 않기야 했겠는가. 다만 안으로는 오로지 문아(文雅)함을 지키면서 밖으로 간혹 여러 사무에 대응한다면 선비의 기풍을 떨어뜨리지 않아 해로움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문아함을 완전히 잊고서 가산 경영에만 몰두한다면 이것은 농부의 일이자 향리 속인들이 하는 짓이 되어 버린다”
6. 조선 시대 큰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으로 ‘인삼 밀수’가 성행했고 이 사업을 이끈 것은 역관들이었다는 점도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국가에서도 이런 밀수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눈감아줬다고 하는데 오늘날 중남미 마약 밀수 사업을 보는 기분. 물론 우리 K-인삼은 몸에도 좋으니깐 마약 따위랑 비교하면은 안 되지만. 어쨌든 조선 특산품 인삼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런 상황을 이용해 인동장씨 가문의 장현이라는 역관이 큰 부를 이뤘고 종내에는 ‘국중國中의 거부’로까지 불렸다고 한다. 실록에까지 그리 기록될 정도이니 과연 그가 이룬 부가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그런데 사극 마니아들은 장현이라는 이름이 익숙할 수도 있는데, 맞다 장희빈이 바로 그의 조카다. 이야기 속 장희빈은 빈곤한 가정에서 자라나 타고난 미모와 배짱으로 임금의 마음까지 훔치는 요부로 묘사되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장희빈은 ‘국중 거부’ 집안의 여식이었던 것이다. 비록 아버지는 한량이었다지만 할아버지도 정3품까지 오른 유명한 역관이었고, 외할아버지도 일본어 전문 역관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복 오빠도 역과에서 장원 급제를 했던, 오늘날 금수저까진 아니더라도 은수저쯤은 확실히 물고 태어난 가진 여성이었다는 말이다. 재산만 말하는 게 아니라 공부하는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으니 머리도 좋았음이 틀림없다. 저자는 숙종이 사랑한 것은 장희빈의 미모가 아니라 그녀가 가진 엄청난 돈일 수도 있겠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는데, 나도 그 의견에 숟가락을 얹고 싶은 생각이다. 참고로 이런 장현의 가문이 장희빈 때문에 멸문지화 수준까지 몰락한 것은 역시 또 역사적 사실. 돈보다 무서운 것이 또 권력이나니. 이 또한무섭구나.
7. 끝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조선판 골드러시다. 앞서 언급한 미두판의 불개미들은 워낙 유명한데, 우리에게도 골드러시의 역사가 있었던 건 또 몰랐다. 금광 은광 찾기 열풍은 조선 후기부터 시작됐다고 하는데 임진왜란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보내면서 식량은 보내지 않고 식량 사라며 은화를 보냈는데 그러면서 은이라는 게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또 명나라에 바치는 뇌물이 보통 은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은 수요가 꿈틀. 은 공급을 늘리기 위해 조정은 일반 백성이라도 은광을 찾아 세금만 잘 내면 캘 수가 있도록 했고 백성들의 은맥 찾기가 시작됐다. 다만 은맥 찾기 은광 발굴은 아무래도 투자금이 필요하다 보니 자본금이 없는 백성들은 그 대신 사금 찾기에 또 뛰어들었다. 금광 근처 강가 모래를 켜서 금 조각을 얻는 그 채취법 말이다. 곡산 옆 수안이 금광으로 유명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끝없이 모여들었다는데 한때 광산 근처에 사는 사람이 1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오늘날 100만 도시 수준이다. (당시 조선 인구 550만 명) 정약용을 필두로 많은 지식인들이 이런 조선 농민의 삶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취급하고 매섭게 비판했다고 하는데 실상은 조금 다르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 격차 속 대부분 소작농이 돼 버린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지는데, 그렇게 일 년 뼈 빠지게 농사지어 세금(10%) 내고 땅 임대료(50%) 내고 하느니 때려치우고 금은이나 찾으러 떠나는 게 훨씬 나았다는 것이다.
8. 그래도 이 때의 골드러시는 아직 ‘순한 맛’, 진짜 광기는 일제 강점기에 시작되는데... 바야흐로 황금광 시대의 도래다 . 특히 1930년대를 휩쓸었던 황금 캐기 열풍 속에서 실제로 ‘일확천금’을 번 가난뱅이들이 드물게 등장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우선 최창학. 평안북도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노름판과 금광만 전전하던 그가 1923년 금맥을 발견한 후 1929년 일본 미쓰이 광산에 130만 원(오늘날 1000억 원 수준)에 팔아치우면서 일약 스타가 됐다. 그는 황금귀, 즉 황금귀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다른 가난뱅이들로부터 추앙받았고 본격적인 금 투자 열기를 이끌었다. 사람들은 논과 밭을 있는 대로 파헤쳤고 때로는 집과 땅을 팔아 다른 금광을 파헤쳤다. 이런 금광 열풍에 뛰어든 사람 중에 우리가 아는 소설가 김유정(맞다 ‘봄봄’ ‘동백꽃’ 쓰신 분)과 채만식(레디메이드인생과 태평천하 그분)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상 여느 투기 열풍의 끝이 그러하듯 ‘골드 러시’의 끝도 좋지 못했다. 너도나도 금 캐기에 뛰어들면서 금맥, 금광의 가격은 천정부지 뛰었다. 거품이 끼었다는 의미인데, 거품은 금본위제의 종말과 함께 뻥 터졌다. 황금귀 최창학의 1000억 재산도 각종 친일 행위와 잘못된 투자로 인해 15년 만에 먼지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니깐 금광으로 막대한 돈을 번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그걸 오랫동안 유지한 사람 또한 더더욱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일군 부가 아니라 행운에 기댄 투기의 말로는 대체로 이렇게 허망한 법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미두거래'의 이야기도 희대의 사기극으로 밝혀진 만주 개척의 스토리가 나오는데 진짜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들이다. 그러니깐 진짜 자나깨나 투기 조심. 정말로 세상에 공짜 점심이란 없는 법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