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오래 전부터 어쩔 수 없는 거였어
“안 그래도 친구들이 회사 처음 가면 연애 얘기 많이 물어볼 거라고 하더라고요.”
이번 주 월요일, 우리 팀에 경력 사원이 한 분 입사하셨다. 그는 그동안 계속해서 해외에서 회사를 다니셨다고 한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그를 환영하는 팀 티타임 자리에서 팀장님이 “만나는 사람은 있어요?”라고 물어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런 류의 모든 질문들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6년 가까이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어느덧 1년 하고도 3개월. 처음 이 회사를 입사했을 당시엔 남자친구를 어떻게 만났고 그의 무엇이 좋은지에 대해 한참 얘기해야 했고 (그 땐 얘기하고 싶기도 했다.), 헤어지고 나서는 왜 헤어졌는지에 대해 변명 혹은 하소연을 해야했다. 그러니 이제는 팀 선배들이 때때로 물어보는 “아형이 요즘 좋은 소식 없어?”의 소식이라 함은 곧 연애사정임을 너무도 안다. 처음엔 그 질문이 못내 불편해 장난처럼 “없어요. 아니 그냥 없어요.”라고 답했다. 가끔은 그냥 솔직해지자 싶어서 “연락하는 사람은 있는데 사귀진 않을 것 같아요.”, 또 어떤 때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며 대답했지만, 사계절이 지나도 딱히 연애사에 큰 변동이 없자 선배들은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왜 걱정하지?) 그러던 찰나에 팀의 뉴비와 수다를 떨던 중, 문득 타인의 연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주는 우리 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늘 이런 질문이 불편한 건 아니다. 지난 주말 친구와 떠난 1박2일 여행에서 나는 48시간 내내 연애 얘기’만’ 했다. 그 전에 만나던 애인에 대한 감상이 어떤지, 그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이 모순적 감정은 무엇인지, 그와의 소중한 추억이 떠오를 때면 어떻게 대처하곤 하는지, 그가 나보다 한 뼘 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또 얼마나 우스운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던 순간들이 실은 어찌나 무색한지와 같은 것들. 그리고 그 후 우리를 스쳐지나간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왜 그들과 사귈 수 없었는지도 토로했다. 혹여나 누군가와 또 연애를 하게 된다면 어떤 모습의 사랑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연애를 주제로 지옥의 밸런스 게임을 하며 농담을 따먹기도 했다. 사랑이 뭐고 남자가 뭔진 모르겠지만 내내 그렇게 떠들어댔는데도 할 얘기가 남아 “다음에 또 얘기하자”며 헤어졌다.
연애를 할 때는 취미가 연애인 것마냥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부족했는데, 사랑에서 빠져나오고 나니 넘치는 시간과 함께 온갖 감정이 몰려왔다. 대부분은 후회, 아쉬움, 공허함과 같이 부정적 감정이었고 이로 인한 무력함으로부터 도망치고자 몸을 닥치는대로 움직였다. 회사에서는 출장 갈 수 있는 프로젝트를 도맡아 했고, 주말엔 빵과 과자를 구웠고, 무작정 차를 끌고 여행을 떠났다. 부지런히 공연과 페스티벌을 보러 다녔고, 나의 불완전함을 잊지 않고자 일기를 썼고, 복싱/필라테스/PT 등 다양한 운동을 시도해보았다. 만나는 내내 그가 내 전부라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삶에서 사람 하나가 빠져나간 빈 자리가 그렇게 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텅 빈 그 곳을 아득바득 나로 채워 나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삶과 사랑의 다양한 형태에서 연애는 비중이 참 작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애를 끝낸 후 멀미 같았던 일상도 시간이 흐르니 이내 어떻게든 정돈이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놔두는데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조차 내 마음을 모르겠는데 상대의 마음은 더더군다나 감히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이를 깨닫고 나니 비로소 안온해진 일상에 새로운 사람을 굳이 들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누군가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모두 감정소모처럼 느껴졌다. 곁에 애인이 없어도 내 생활은 너무 평탄하고, 자유롭고, 한심하고, 아름다운데 굳이 누가 있어야 할까? 연애는 그저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까 자조에 빠졌다. 결국 ‘긴 세월에 변하지 않을 그런 사랑은 없겠지만 그 사랑을 기다려줄 그런 사람’은 나 자신 뿐이라며.
그럼에도 친구들을 만나면 꼭 연애 얘기할 때 제일 목소리가 커진다. 팀장님의 연애 질문은 무례하다며 고개를 젓다가도 마음 맞는 동료들이랑 얘기하는 건 또 재밌어죽겠다. 주니어들끼리는 낄낄대며 지난 연애 현 연애를 곱씹는 수다를 떤다. 카톡이 몇 백 개 밀려있더라도 소개팅을 하고 왔다는 친구의 연락엔 곧바로 답장을 한다. 내 삶엔 연애 말고도 분명 흥미로운 일이 참 많을 텐데, 첫 글을 하필 ‘연애’를 주제로 쓰고 마는 것이다. 이런 내 자신이 -속된 말로- 노간지라 여기면서도.
나는 어쩌면 ‘우린 오래 전부터 어쩔 수 없는 거였’다며 나타날 운명적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