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운명'으로 바꿀 용기
영화, '500일의 썸머'
우린 우연이었을까. 돌이켜보면 그렇다. 내가 그때 너의 카톡을 늦게 읽었더라면, 내가 그때 그 수업을 듣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때 용기를 내지 못했더라면. 우린 과연 사랑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모든 사랑들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영화 ‘어바웃 타임’의 앞부분의 내용은 잔인하게도 이런 씁쓸한 생각에 쐐기를 박아준다. 영화 ‘어바웃 타임’은 시간 여행자의 이야기이다. 우연히 어떤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만 했던 주인공은 다시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없는 잠깐 동안에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를 보고도 그녀의 감정은 미동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이처럼 사랑이란 게 정말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덧없는 것일까? 영혼이 통한다는 느낌은 정말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일까?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주인공은 갖은 노력을 통해 사랑을 다시 얻게 되지만, 사랑은 운명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나는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500일의 썸머’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톰’과 그렇지 않은 ‘썸머’ 두 사람의 이야기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카드와 카드 문구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톰’은 어느 날 자신의 상사의 비서로 들어온 ‘썸머’와 사랑에 빠진다. 톰은 운명적인 사랑을 믿고 있었고, 자신에게 그 대상이 ‘썸머’라고 확신했다. 반면 썸머는 이혼한 가정에서 자라온 탓인지, 사랑에 대해 별로 환상이 많이 없어 보인다. 엘리베이터에서 톰이 듣고 있는 음악에 관심을 보이며 자신도 그 노래 좋아한다고 얘기하는 썸머와 톰은 영혼이 통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때부터 톰은 계속 썸머의 주위를 맴돌며 썸머의 관심을 끌고자 하지만,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소심한 톰은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단정 짓고 마음을 접으려고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썸머가 키스를 한다. 그 때부터 둘은 보통의 연인들처럼 행복한 시간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톰은 문득 자신과 썸머가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진다. 썸머는 처음 만날 때부터 서로 진지해 지는 게 싫다며 서로를 남자친구, 여자친구로 규정짓고 싶지 않아한다.
"우리 무슨 관계야?"
"무슨 상관이야? 난 지금 행복해, 자기는 아니야?"
"톰 나는 널 좋아해, 그저 관계를 원하지 않을 뿐이야."
처음에는 이런 썸머의 말에 톰도 동의하며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짐에 따라 불안해지고, 관계에 애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톰이 그러면 그럴수록 썸머는 더욱 멀어져 가고,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썸머는 어떤 남자와 결혼한다.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의 내용을 물어봐준 사람과.
이 영화는 단번에 바로 이해가 되는 영화라고 보긴 어렵다.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썸머의 내면을 섬세하게 따라가야 하지만, 톰의 시선으로 영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는 썸머를 표면적이고 단편적으로 밖에 파악할 수 없다. 나는 이게 철저하게 감독의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톰이 썸머에게서 놓친 것 때문에 사랑이 깨진 것이고, 그것을 파악해야 썸머와 이 영화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톰의 눈에 비친 썸머는 너무나 단편적이고 표면적이다. 이것은 톰이 썸머의 내면을 그렇게 섬세하게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조금 섬세한 사람의 눈이었다면 보였을 수많은 것들이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뜻언뜻 톰의 눈에도 썸머의 내면을 읽을 수 있는 단초들이 보이긴 한다.
일단 썸머는 단순히 책임지는 관계가 싫어 가볍게 톰을 만나다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린 썅년(Bitch)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에 있어서 배신자는 톰이다. 먼저 톰은 운명적인 상대라고 느꼈으면서도 굉장히 소극적인 태도로 사랑에 온몸을 던지지 못한다. 그렇게 시작조차 안 될 뻔한 사랑을 되살린 것은 썸머다. 썸머는 먼저 톰이 듣고 있던 음악에 관심을 가져준다. 또한 자신을 좋아하냐는 썸머의 질문에 친구로서 좋아한다고 말하는 답답한 톰에게 썸머는 다음 날 키스를 날리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썸머의 이런 적극적인 말과 행동이 아니었다면 톰은 계속 자신에게 관심 없어 보이는 썸머를 원망하며 지냈을 것이다. (잘생기고 몸 좋은 체육관 남자와 만나고 있을 거라는 피해의식과 함께) 만남이 시작된 후에는 어떤가. 여전히 톰은 사랑의 배반자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건축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는 썸머와는 달리 톰은 썸머가 좋아하는 링고스타를 가볍게 무시하고 비하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고 지지해 준다. 아니, 더 나아가 우리는 더욱 그것에 대해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른다. 원래 관심도 없었던 춤에 대해 애인을 따라다니며 결국 춤을 더 사랑하게 된 한 남성을 떠올려보라. 이게 사랑에 빠진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즉, 사랑은 이렇게 상대방이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톰은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어쩌면 톰은 썸머를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것일 지도 모른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사랑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이 있다. 사랑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 사랑을 운명처럼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단언컨대 아마 그 운명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전형적으로 톰은 사랑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인 것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썸머가 좋아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톰은 그녀를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에 빠진다. 냉정하게 한 번 생각해볼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그렇게 운명이라고 생각할 만큼 작을까. 미안하지만 아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심지어 꽤 많을 것이다. 물론 그 사람과 나의 공통분모는 중요하다. 두 사람의 공통분모는 사랑의 강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니까. 하지만 거기에 취해 사랑을 만들어가는 것에 소홀히 하는 것은 사랑을 깨치는 일임에 분명하다. 사랑에 있어서 두 사람의 공통분모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서로의 다른 지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랑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사랑하는 그 무엇을 함께 사랑해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사랑이 만들어져 간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우연을 운명으로 만들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글쓰기를 좋아하는 한 남자와 고양이를 사랑하는 한 여자가 있다. 처음에 그 남자는 자신보다 고양이에 더 큰 관심을 쏟던 여자를 원망한다. 남자는 그 감정을 고양이에게 투사하기 시작하고, 결국 고양이를 싫어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 여자를 사랑했기에, 그녀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여자보다 그 고양이에 더 애정을 갖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여자는 고양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남자는 고양이 관찰일지를 써 블로그에 올렸다. 그렇게 서로 다른 둘은 완전히 섞여 새로운 그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영화에 나오는 운명적 사랑 같은 이야기를 별로 믿지 않고 관심도 없다. 중요한건 평범한 99% 우리의 사랑이야기니까. 평범한 우리들의 사랑에서 아마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이러한 두 사람만의 고유한 것들이 쌓여가고, 그 사람이 더 이상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이 내 운명의 상대가 되는 게 아닐까. 계속 사랑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이러한 것들을 쌓아가는 커플이 과연 헤어질 수나 있을까.
나는 연애와 사랑을 구별한다. 연애는 사랑과 달리 각자의 자리에서 거리를 유지한 채 재밌게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이 커플에게 창조는 없다. 그냥 지금까지 살아 온대로, 그 관성을 유지한 채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 마치 자신의 인생 퍼즐에 있는 어느 빈칸에 그 사람이 딱 들어온 것처럼. 하지만 사랑의 경우는 좀 다르다. 사랑은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인생 퍼즐을 뿌리 채 흔들어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인생 퍼즐 한 가운데 자리한다. 그리고 이렇게 요구하는 것처럼 들린다. “다시 배치해.” 그렇게 사랑은 내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기존의 것과 다른 그 무언가를 창조하게 한다. 톰은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썸머와 ‘연애’를 하고자 한 것이지 ‘사랑’은 아니었다. 톰은 그렇게 소위 말하는 ‘운명적 사랑’에 취해 운명을 만들어가지 못했던 것. 영화 중간에 톰은 계속 썸머와 자신과의 관계에 의문을 갖고, 관계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한다. 썸머는 ‘남자친구’, ‘여자친구’라는 이름 붙이기와 관계설정을 거부한다. 사실 “오늘 부터 우리 1일이야”처럼 웃긴 건 없다. 사랑이란 건 두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인데, 오늘부터 내 애인이 되면, 이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어제보다 더 커지나. 이것은 두 사람의 사랑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가기 보다, 애인이라는 편안한 이름 속에서 그냥 행복감을 만끽하며 지내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소유욕과 자기애의 이상한 형태라고나 할까. 아무튼 썸머는 사랑에 대한 이런 안일한 태도를 거부한다. 사실 충분히 서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만들어간다면 그런 관계설정과 이름이 무슨 소용 있겠나. 누가 뭐래도 우린 사랑인데.
톰과 달리 썸머는 계속 사랑을 만들어가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인다. 톰이 좋아하는 건축에 대해 자꾸 물어보고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가고자 했지만 톰은 그런 썸머를 읽지 못하고, 단순히 썸머가 마음이 식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둔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슬프지만 민감하게 상대를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은 매정하다. 그렇게 썸머는 떠나가고. 톰은 갑자기 변해버린 것 같은 썸머를 이해하지 못한다. 참고로, 썸머가 결혼한 후에 톰에게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그는 내가 읽고 있던 책에 대해 물어봐줬고, 지금 내 남편이 되었어." 이 말을 듣고 과연 톰은 썸머의 말 뜻을 이해했을까.
이를 통해 우린 하나의 교훈을 얻어갈 수 있다. 사랑을 단순한 감정 정도로 이해하지 말 것. 사랑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굉장히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것이라는 것. 중요한 것은 운명적 사랑이 찾아오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내게 우연을 운명으로 만들어갈 힘과 용기가 있느냐 라는 것. 다행인지 불행인지 톰은 썸머와 헤어진 이후 자신의 삶에 있어서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갈 힘이 생긴 듯하다. 톰은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건축에 지원한다. 이 과정에서 집 벽에 썸머와 기획했던 건축물들을 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부정적으로나마 썸머가 톰을 자극한 걸로 보인다. 그렇게 운명을 만들어갈 힘이 생긴 톰에게 또 다른 우연히 찾아온다. 면접 대기실에서 만난 한 여인인 ‘어텀(가을)’이 그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우연으로 지나칠 톰이 용기를 낸다. 과연 이번에 톰은 우연을 운명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