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
photo by 어진
언젠가 혜원이와 함께 TV로 영화채널에서 나오는 리암 니슨의 '테이큰'을 본 적이 있다. 스토리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친구와 함께 파리 여행을 갔다가 지하조직에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해 은퇴한 특수요원 출신의 아빠(리암 니스)가 본인의 실력을 십분 발휘해서 96시간 안에 딸을 구한다는 초인적인 내용인데 딸을 구해야 한다는 명분도 너무 확실하고 추격전이 스릴 넘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이다. 이미 여러 번 봤음에도 혜원이와 함께 다시 영화를 보다가 리암 니슨이 열심히 적과 싸우는 장면에서 "혜원아.. 아빠는 저렇게 못 구해줘.." 라고 하니 "알아요. 기대도 안 해요."라고 해서 꽤 씁쓸해하며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렸다.
지금도 자주 쓰이는 워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나 상처 받았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주로 교회 청년부에서 많이 쓰이던 이 말의 뉘앙스에는 '너의 말투가, 너의 표정이, 너의 행동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 말을 했던 당사자도 혹은 들었던 상대방도 정확히 어떤 의도에서 사용이 되는 말인지 알지 못한 채 서로의 감정을 뭉뚱그려서 '상처'로 표현했던 것 같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들 투성이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제법 심각한 상태였기에 '상처'라 불리는 감정들은 우리의 마음을 어렵게 했고, 그 상태를 극복하느냐, 참고 견디느냐 아니면 대판 싸우고 그 친구와 절교하느냐가 중요한 관심사였었다. 그럼에도 극복할 힘도, 아니면 대판 싸울 용기도 없었던 나는 그냥 끙끙 앓은 채 참고 견디면서 그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라는 편을 주로 택하고는 했다.
사회에 나와보니 맘을 어렵게 하는 일들은 학창 시절 친구와 겪었던 갈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각도로 폭이 넓었으며 더 깊고 더 무겁게 다가왔다. 어쩌면 지나온 모든 과정들은 하루하루 발생하는 예측 불가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지나온 게 아닐까 싶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중력을 거스르며 침대에서 일어나 마치 '사랑의 블랙홀'같이 그제도 어제도 씻었던 것 같은데 오늘도 똑같이 단장해야 하는 준비과정을 마치고 회사를 가기 위해 만원 버스에 오르거나, 대체 내가 걷는 건지 공중부양으로 떠밀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지옥철을 타는 순간 바로 퇴근하고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을 한 가득 안은 채 일터로 간다. 이미 내가 지닌 에너지의 70% 이상 소진한 느낌이지만 시간은 이제 고작 아침 8시 40분, 이 체력과 감정상태로 무려 9-10시간 이상을 일터에서 버텨야 된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이미 친구와의 갈등 따위는 그냥 콧웃음을 치도록 만들어버린다. 내가 있는 이 곳에는 친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분 단위로 일어나고 있으며, 해결해야 될 과제들은 마치 '사랑의 블랙홀'같이(!) 그제도 어제도 산더미였는데 오늘도 산더미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란 맘 맞는 직장 동료들과의 짧은 잡담과 어김없이 돌아오는 퇴근시간, 한 달에 4번인 금요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월급일 - 곧 허탈해지는- 뿐이다.
아마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하라면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직장생활을 9년 만에 졸업하고 개인 사업을 해 온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삶의 구조를 나에게 맞는 형태로 제법 많이 바꾸었다.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방식, 일에 대한 합리성과 그 안에서 느끼고 싶지 않아도 느껴야만 했던 감정들, 상사와 클라이언트와 거래처 직원들을 포함한 타인과의 관계까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면 속절없이 받아내야만 했던 상황에서 어느 정도는 조절이 가능한 형태의 주도권을 내 편으로 가지고 오는 방식으로 나는 나를 지키기로 했다. 지난 몇 년간 그 구조를 세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사람마다 각자가 놓인 상황과 추구하는 방향은 모두 다를 테지만 내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 요소 중 하나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지 않을 권리'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는 스텝들이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었고, 새로 만나는 고객들에게도 일보다는 진심으로 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상사나 클라이언트는 가급적 피하려고 했고, 나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 늘 점검했다. 한정된 자원과 능력으로 인해 그 안에서 수많은 좌절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좌절들이 결국은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고, 웬만한 문제들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게끔 무뎌지게 해 주었다. 대신 어린 시절의 나였다면 절대 감당할 수 없었을 더 큰 책임과 의무가 부과되었지만 이 또한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어찌어찌 해결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절대 풀리지 않을 문제란 없구나'를 여전히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혜원이와 함께 공유가 주연인 '부산행'을 보면서 "아빠는 만약 저런 상황이 되면 제일 먼저 좀비가 될 거야. 주인공처럼 끝까지 고통받다가 막판에 좀비가 되면 너무 괴로울 거 같아."라고 하니 혜원이가 피식 웃는다. "아빠, 월드워Z 보면서 이미 똑같은 말 했어요."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는 저런 상황에 너 못 구해줘.." "테이큰 보면서 똑같은 말 했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