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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Jan 23. 2024

모르는 것을 쓰기 Vs. 있는 것만 쓰기

글쓰기와 돈 쓰기

모르는 것을 쓰는 것Writing, 있는 것만 쓰는 것Spending

어느 쪽이 더 힘이 셀까?



모르는 것을 쓰기

서재는 어두침침하다. 컴퓨터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전부다. 중후한 오크 컬러의 책상 위에는 종이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실적 부진 은행주 하락, 예탁금 줄고 미수금 늘어, 미국 금리 인상 가능성 따위의 메모들이 순서 없이 휘갈겨 쓰여 있다. 그 옆엔 안나와 딸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드는 사진이 액자에 꽂혀 있다. 재현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고개를 젖히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실리에 밝은 사람, 최연소 지점장으로 승진한 사람, 누구보다 제일 앞에 서는 사람. 재현의 고객들은 그를 신뢰했다. 증권사가 부도 위기에 몰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도 어느 정도 감은 잡고 있었잖아? 왜 이렇게 답답한 척 굴어?" 동료들은 재현을 답답한 취급했다. 고객들은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처럼 고통스럽게 울분을 토했다. 침을 튀겨가며 재현의 셔츠를 한 움큼 잡고 흔들었다. 증권사 회장은 기소되었고, 재현은 고객들 앞에서 직원들을 대표해 무릎을 꿇다.



10년 전, 재현이 안나를 처음 만난 곳은 피아니스트 이유현과 첼리스트 임재성의 듀오 리사이틀 공연장에서였다.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둘은 대화가 잘 통했다. 그녀는 첫눈에 통통 튀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자였다. 첼로를 전공하는 음대생이라고 했다.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은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데도 밉상은 아니라서 사람들은 다들 그녀를 보면 깔깔대며 즐거워했다. 격을 깨는 사람, 재현과는 다른 방식으로 열정적이었다.


(출처: www.lsho.co.uk/tahitian-dance)

"타히티안 댄스를 추는 걸 본 적이 있어."

"응? 어디서?"

"티브이에서 어떤 여자가 팔꿈치는 흐느적흐느적 부드럽게 구부렸다 펴면서 살랑살랑 골반을 흔드는 데 말이야. 그 위로 드리워진 나무가 너무 커서 그 여자가 팅커벨처럼 보였는데 그날 오후의 날씨 때문인지, 그 여자가 조그맣고 우아한 몸짓을 해서였는지는 모르겠어. 그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고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데 세상에 저런 데가 다 있네 싶더라고."

"넌 오히려 그런 여자 옆에서 바이올린 켜는 연주자에 더 가까울 줄 알았는데?"

"재현 씨는 10년이나 같이 살았으면서 아직도 날 잘 모르네."



오래전 대화를 떠올리니 재현은 하루라도 빨리 안나와 딸을 보고 싶었다. 고객들에게 이번 건에 대해 사죄의 메일을 보내고 이 일을 그만둬야 할 테지만, 안나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을 자신이 없다. 딸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영어 교육을 위해 아내와 딸을 미국으로 보낸지 어느덧 3년. 그는 오직 일에 매달렸다. 연락도 자주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서늘한 부엌 한가운데에 앉아 먹는 물기 없는 밥은 모래알 같았다. 재현은 지금 안나가 필요했다.



"자기한테 일은 뭐야?"

"토르나르수크 같은 존재?"

"응? 토르...뭐..?"

"폴라에스키모들은 북극곰을 그렇게 불렀대. 토르나르수크, 힘을 주는 자. 곰을 만나서도 이겨서 살아남는다면 내 안에서 뭔가 씨앗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버티면서 살고 으르렁 거리면서 살다가 가끔 웃기도 하는 그런 삶. 나는 토르나르수크가 필요해."



불과 3년 만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때의 재현은 확신에 찬 눈을 반짝이며 한껏 고양되어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지금 그는 건조해진 목을 침으로 겨우 적시며 눈을 껌뻑이고 있다. 안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 2주만 더 있다 한국에 갈 것 같아."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말투. 재현은 자신도 모르게 폰을 집어던졌다. 바닥에 내쳐지며 나뒹굴면서도 들리는 소리. "여보세요, 자기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있는 것만 쓰기 

'번거로움은 이제 안녕~저희가 다 알아서 해드릴 테니 편안함만 누리세요.'



신용카드 하나와 체크카드 2개를 해지하러 앱에 들어간 수현은 잔망스러운 문구를 보고 쓴 미소를 지었다. 알아서 다 해주는 손 빠르고 부지런한 남편을 둬서인지, 웬만한 건 다 귀찮고 하는 일에만 온 에너지를 다 쏟는 성향 탓인지 수현은 카드 해지를 무작정 미루고만 있었다. 고객센터는 언제나 대기고객이 10명쯤은 되었고, 대기시간은 30분이 넘게 걸렸다. 툴툴대며 끝도 없는 인증을 견디다 수현은 울컥했다. 이게 다 뭔가.



환은 요즘 유독 수현에게 집요하게 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노후 대비에 열을 올렸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밤새 잠을 한숨도 못 잤다며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있곤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보고 있기 괴로울 정도로 무력해 보이던 모습과 너무 다른 그의 모습을 보며 수현은 그 온도차에 적응하면서 괜찮은 척 평온하게 하루를 지나가는 일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유레카로 점철되어 상기된 그의 마음은 좀처럼 사그라들거나 가라앉을 줄 몰랐다.



계좌를 4개씩 추가로 열었고, 카드는 5개씩 잘려나갔다. 지갑 속에 숨어서 더 이상 효력도 없는 신용 카드들, 연회비로 좀 먹으면서도 혜택 하나 챙기지 못하는 체크카드들이 뭉텅이로 발견될 때면 민망함과 함께 자괴감이 밀려왔지만 툭하면 맥주 4캔을, 할인해서 샀다며 피자 한 판을, 피자를 먹자고 해놓고 치킨까지 시켜 배 터지게 먹고 나른해져 잠드는 환을 볼 때마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는 카드 해지도 재빠르게, 고객센터도 스피커폰으로 별 짜증 없이 척척해내는 사람이었다. 수현은 그의 무던함이 든든하고 자주 얄미웠다.



신혼 생활 3년 차, 수현은 같은 싸움은 반복하지 않기로 한다. 그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나 같은 이유로 사랑했고, 같은 이유로 죽일 듯 싸웠다. 한바탕 소동처럼 신용카드 절단식이 끝나고 체크카드만 폰에 등록했다. 그의 말대로 꾸역꾸역 일 년 치 계획을 세우고 나니, 수현은 앞으로 보낼 1년이 아득하다.



환도 불안했는지 묻지도 않은 재무 계획의 설계 과정을 중얼거리듯 설명했고 수현은 하나하나 살펴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아주 멀리 갈 수도 아예 주저앉아버리기도 하는 사람. 수현은 그 중간 어디쯤에서 애매하게 헤매는 사람. 그가 멀리 갈 땐 기다렸고, 주저앉을 땐 더 멀리서 기다렸다. 둘은 어쩌다 만났고, 자주 헤어졌다. 쓰는 삶에서 서로가 찾았던 방법이란 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전히 궁금해하면서.




잘 쓰는Write 삶, 잘 쓰는Use 삶

잘 쓴 글은? 내일 쓰는 글.

잘 쓴 돈은? 내일 쓰는 돈.



재현과 수현의 삶이 교차한다. 그들은 잘 써보려고 새로운 이야기를 쓰다 좌초되고 어긋난다. 모르는 걸 쓰는 것과 있는 것만 쓰는 삶 중에 어떤 게 힘이 더 셀지 고민하다가, 결론 대신 '둘은 다른 걸까?'라는 질문을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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