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거리엔 어스름이 깔려있고 한 겨울의 세찬 바람은 소리없이 분다. 이른 출근을 하는 차들의 엔진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온다. 먼발치에서 뭔가를 옮기는 소리가 들리고.
쿵쿵 터억 쾅쾅 트륵
"여기쯤 놓으면 될까?"
"응, 사거리 공사가 한창이더니 끝날 기미가 안 보이네. 요즘은 이 쪽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더라고."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남자와 키는 좀 작아도 체구가 다부진 사내가 낑낑대며 기기를 내려놓는다.
'버튼을 누르면 쏟아집니다. 당신만을 위한 아이디어.'
출근길에 버스 정류장을 향하던 보영이 지나간다.
"응, 지금 버스 타러 가는 길. 변속기 모듈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이 차 수리 맡겼지, 뭐. 그래도 생각보다 수리비 덜 나와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본다. 어? 이거 뭐지? 아니, 못 보던 게 길에 놓여있어서. 아, 암튼 나 지금 늦어서 이따 또 전화할게."
(며칠 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자주 쓰시는 향은 품절이지만 워낙 자주 구매하시니 고객님껀 따로 빼놓았었거든요. 또 찾으실 때가 되어서요."
"이번에는 좀 다른 향을 써볼까 해서요."
"네, 알죠. 전화 주셔서 미리 몇 가지 골라놨어요."
보영은 땀 냄새나 유쾌하지 않은 냄새가 나지 않는지 수시로 체크했다. 악취가 진동하는 자리에 부득이하게 노출된 날은 약속도 잡지 않았다. 지방대를 나왔고 내세울만한 스펙도 별로 없었지만 영업 사원 면접에서 최애 향수의 종류와 고객별 맞춤 향수에 대해 줄줄이 읊은 뒤 '좋은 향기로 남고 싶습니다.'라는 발언을 하고 나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했다. 그렇게 별 기대 없이 지원한 회사에 덜컥 붙었다.
취업 전선에서 7년째, 7전 8기라는데 도통 앞이 보이질 않아 서점을 통째로 뒤져 안 읽어본 책이 없을 정도로 팠다. 이론과 논리로 무장한 책에선 차갑게 식었고 '절박하고 절실하면 다 된다'는 구절에선 화가 치밀었다. 누군가의 논리나 설득 없이 스스로 선택한다는 '환상'은 어쩌면 자유라는 족쇄를 갈망하면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보영은 누군가가 그런 착각이라도 일으켜 주기를 바랐다.
동기인 지연은 뭐든 가능해 보이는 사람이었다.사무실에 들어설 때 흰 셔츠에 옅은 브라운 톤의 팬츠를 입고 롤** 시계를 차고 에**** 가방을 들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물론 출근할 때 몰고 오는 차가 자주 바뀌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지연은 3개 국어에 능통했고 말투에서 여유와 위트가 넘쳤다. 진짜 격은 오히려 그걸 숨기는 사람한테 있는 것 같다고 보영은 생각했다. "이건 엄마 차야." "아, 이건 리스." 둘러대는 말에도 다급함은 없었다. 그런 지연과 친해지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연과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게 된 건 영업사원 연수 자리에서였다.
보영은 5분 일찍 도착해서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북적북적한 가운데 설렘과 긴장이 감돌았다. 어색함을 달래려고 책자를 들춰봤다. 알록달록 화려한 색상의 책자에는 회사 사보에 으레 등장하는 보여주기식 사진, 회사의 영예를 드높이는 각종 수상 경력들로 가득했다.
1. 영업사원에게 필요한 3가지 : 경청, 배려, 공감
2. 영업 사원의 먹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법
3. 판매 전략을 구매 전략으로 바꿔라!
4. 믿어달라는 말 없이, 믿게 만드는 법
목차를 읽어 내려가던 보영은 출근길에 무심코 지나친'당신을 위한 아이디어를 팝니다'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퇴근길에 다시 가볼까?
"여기 앉아도 될까요?"
10분 늦게 도착해서 사람들로 꽉 찬 연수장에 꾸역꾸역 자리를 찾아 안으로 들어온 모양새가 어째 내가 알던 지연과는 달라 낯설었다. 20분쯤 늦어도 커피 한 잔 들고 뒤에서 느긋하게 들을 것 같은, 아니 늦으면 아예 참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신에 새삼 놀랐다. 하지만 더 놀란 건, 지연에게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향이 났기 때문이었다.
뉴스는 연일 출산율 하락과 급증하는 노령화에 대해 떠들었다. 회사는 내부인력을 줄였지만 영업인력은 오히려 늘렸다. 오늘 연수를 진행하는 사람은 영업이 '물건팔이'로 대접받는 세상에서 '영업의 여왕'이라 불린다고 했다. 무엇이든 팔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의 비법이 궁금했다.
연수가 끝나자 모두들 일제히 흩어졌다. 점심시간. 낯선 환경 속에서 밥친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지연이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같이 밥 먹을래요?" 내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지연이 궁금했던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지연씨아빠 회사가 좀 규모가 있잖아. 매출이 몇 십억이래. 아빠 찬스 쓴 거지. 사람이 모난 데도 없고 아는 게 많긴 하더라." 여기저기서 들어 조각난 파편들을 퍼즐처럼 맞춰보고 싶기도 했다.
막상 지연은 내게 일상 질문을 던지고는 듣고만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싶어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꺼냈다. 살을 조금 덧붙여서 그럴듯하게 지어냈다.
우연히 들른 스시집이 맘에 들어 한 달 동안 열 번이나 갔는데 주인이 내가 단골인 걸 모르더라는 얘기. 침대를 보러 갔다가 만난 개성 넘치는 직원들 이야기. 이를테면, 롤렉스 짝퉁을 차고 정장을 쫙 빼입은 퉁퉁한 사람이 나와서 '제가 바로 템* 본사 최초 교육 시작한 사람입니다'라며 침대소개보다 자기소개에 더 침을 튀기던 모습.
물론 꽉 끼는 정장 차림에 열정적으로 침대에 누워 통통거리는 모양이 웃기면서 짠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싶었지만 둘 다 영업 사원으로 들어온 상황에 이런 이야기는 좀 아니다 싶어 꾹 참았다.
혼자 너무 떠들었나 싶어 지연에게 물었다. 롤렉스와 에르메스와 미니에 대해서. 이런 건 좀 대놓고 물어봐줘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런데 지연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실수한 걸까 싶어 급히 화제를 돌리려고 아무 얘기나 꺼냈다. "근데 지연 씨 피부가 진짜 좋네요. 피부 좋은 사람들 보면 진짜 부럽던데. 긍정적이고 스트레스도 잘 안 받는다고 하던데. 피부보다 그게 더 부러워." 이것도 아닌가.
"보영 씨, 팀장님이 밥 먹고 좀 보자고 하시던데?" 사수가 지나가면서 툭 던지듯 말했다. 이미 대화는 망한 것 같아 어색함을 어쩌지 못하고 있던 차에 얼른 밥 먹고 일어나자며 다급한 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