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영 씨, 이번 건 좀 책임지고 맡아서 해줘야겠는데?"
"네? 제가요?"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이 원래 이런 큰 일들을 하나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저는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놀란 가슴만 쓸어내리고 있었다. 처음 들어온 사람에게서 대단한 역량을 발견했을 리는 없고. 설사 잠재력을 봤다고 해도 이건 그냥 일을 시키기 위한 일 아닐까. 회의에서 회의로 이어지는 하루를 보내며 보영은 생각한다. 친절한 사람은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 호구가 돼. 아니, 친절해서가 아니라 물러서 그런 거 아닐까.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고 싶어졌다. 아직 집구석에 굴러다니는 담배가 좀 있을지도 모른다. 지연은 첫 만남 이후로 내게 말을 놓았다. 아주 쉽군. 동기이면서 또래이기도 해서 우린 제법 말이 잘 통했다. 퇴근 후 호프집에서 만난 날, 초면에 롤렉스와 에르메스와 미니에 대해 물었던 나의 당돌함에 놀랐다고 말하면서도 취기가 오르자 자신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풀어냈다.
"우리 아빠는 본인이 자수성가해서 일궈놓은 일이니까 내가 더 잘했으면 해. 남들 눈에는 안 보이겠지만 스파르타식 훈련이 따로 없어. '내 친딸 맞냐?'란 소리까지 들었다니까? 나도 여기 들어오기 전엔 나름 잘 나갔는데 말이야."
지연의 부모님을 본 적은 없지만 너무 자주 전해 들어서 마치 본 적 있는 사람들 같았다. 모르는 사람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느낌은 어딘가 이상하다고 보영은 생각한다.
"우리 엄마가 고생이 많지. 내 하소연 들으랴, 아빠는 답답하니까 엄마 붙잡고 하소연. 어디 가서 얘기해 봤자 '배부른 소리다' '스트레스받아도 그 정도는 참아야지' '난 네가 부럽기만 하다' 이런 식이니까 어디 가서 말을 못 하지."
"회사 들어오기 전엔 무슨 일 했어?"
"음, 강사를 좀 했지. 나름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돌아서 돈도 꽤 벌었지? 영어도 가르치고, 독일어도 가르치고."
"독일어? 독일어도 할 줄 알아?"
"응, 어쩌다 그렇게 됐네. 헤헤." 지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애들한테 되도록이면 안 하는 게 좋은 질문이 있어. 그게 뭔지 알아?"
"뭔데?"
"'NO'라는 대답이 나오는 질문. 이왕이면 'Yes'가 나오는 질문이 좋지. 이를테면, '공부 열심히 하고 있지?'보다는 '요즘 걱정 많지?'같은 질문. 내가 일했던 곳이 상담을 주 3회는 해야 했고, 학부모들 치맛바람 세기로 유명했거든? 몇 분을 기다렸는데 아직도 상담 차례가 안 오냐면서 큰 소리로 역정을 내고 손가락질을 하는 학부모도 있었고, 내가 너무 물러서 본인 아이가 착실하게 공부를 안 한다고 전화하는 학부모도 있었어. 가끔씩은 '우리 애가 자꾸 거짓말을 해요.'라며 울먹이면서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어."
"애들 상담은 안 하고 학부모 상담만 하는 거야?"
"아니, 애들도 하지. 근데 학부모 상담하고 나면 아이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기도 하더라."
세상 쿨해 보이던 지연에게서 낯선 모습을 보면서 보영은 태현의 엄마를 떠올린다. 소꿉친구였던 태현의 집에 놀러 가면 어린 보영은 태현의 엄마를 '엄마'라고 불렀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내게 매번 복숭아를 한 박스씩 보내주는 엄마와 통화가 끊긴 지는 꽤 오래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태현의 엄마라서 좋았다. 태현은 언제나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일 하나를 잘 끝내면 또 다른 일이 들어왔다. 덜컥 붙은 기쁨은 입사와 동시에 사라졌고, 보영은 몇 개월 만에 일이 자신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다들 각자 숨 쉴 구멍을 찾는 거야. 나도 선배들 보면서 '왜 일을 저렇게 대충 하지?' 싶었을 때가 있었거든? 근데 결국 일이 몰려드는데 하고 나면 허무한 거지. 어떻게 일을 대하는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뭐." 선배는 자신이 선배가 아니었던 시절의 얘기를 곧잘 하고 했다. 한숨을 내쉴 땐 셔츠 너머로 담배 쩐내가 났다.
퇴근길, 보영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기기 앞에 섰다. '그동안 정신이 없긴 없었구나. 그래도 아직 안 없어지고 있었네.'
'버튼을 누르면 쏟아집니다. 당신만을 위한 아이디어.'
문구 주위로 자줏빛 대형 버튼 세 개가 반짝이고 그 밑엔 사용법이 적혀있었다. '미래' 버튼은 누를 때마다 거울 기능이 자동으로 켜졌고, 누를 때마다 줌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유' 버튼을 누르니 '주의사항: 반드시 과거의 선택을 긍정할 것.'이라는 문구가 떴다. [OK] 버튼을 눌러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마지막 '시뮬레이션' 버튼은 감각을 설정하도록 되어있었는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원하는 감각 경험을 추가할 수 도 있었다.
히스토리 폴더에는 그동안 이곳에 다녀간 사람들의 기록이 남아있었다. 어째서 다들 지우지 않은 걸까?
감각 기능은 히스토리와 연동되어 다음 사람의 옵션에 반영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세상을 떠난 아들과 꿈꿨던 즐거운 캠핑 사진, 죽은 환자의 마지막 숨소리, 아이를 낳기 전 잘 나가던 모습, 어릴 적부터 간병해 온 부모님의 살 냄새 같은 것. 고통스러우면서 그리운 것들. 그리운 것이 고통스러운 추억들.
그 밖에 귀엽고 뿌듯한 감각도 있었다.
통통하고 뽀얀 아기 사진이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사를 바라보는 듯한 반려묘 사진. 돼지 저금통에 수시로 넣었던 500원이 모여 3만원이 되었을 때 친구들에게 피자와 햄버거를 사는 모습.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해서 적어주세요. 당신에게 어울리는 향수를 추천해 드려요.
"향수? 신박하네.." 후각 버튼에서 보영은 머뭇거렸다.
태현이 죽던 날 거리에 가득했던 연기, 진동하는 피 냄새를 잊지 못한다. 행복을 시연simulate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는 일이 얼마나 뜻대로 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말하던 지연이 떠올랐다. 지연에게서 익숙한 향이 났던 이유도.
보영은 태생적으로 심장에 박힌 핀에 자주 찔리는 사람이었다. 불행한 기억을 지우려고 할수록 행복한 기억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진동 소리)
"보영아, 난데..., 지금 좀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