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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Feb 01. 2024

알로하 정신(Aloha Spirit)

초초초단편 최종화

"웬일이야. 이 시간 여길 다 오구."

"퇴근하는데 저번에 네가 얘기했던 향수 가게 생각나서 들렀다가 길을 잃어버렸지 뭐야"

"으이구~"

"너 아니었음 미아 될 뻔했다."

"잘해라 언니한테."


도로 한복판은 퇴근 차량과 학원가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학부모들로 북적였지만 금세 한적한 길이 펼쳐졌다. 차 한 대가 전조등을 요란스럽게 밝히며 지나갔다. 조수석 옆 칸에 새틴 슈즈의 앞머리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라운드 코가 닳아있지만 아직 한창 신어도 될 것 같아 보였다.


'웬 발레 슈즈지?'


"보영아, 너야말로 아직 집에 안 가구 뭐 하고 있었어?"


"아, 우리 집 근처에서 신기한 기기를 하나 발견했거든. 첫 출근 때 우연히 보고 궁금했는데 이제야 다시 생각난 걸 보내가 정신이 없긴 했구나. '당신을 위한 아이디어를 팝니다?' 문구가 굉장하지?"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나도 해보다 말았는데 네 생각나더라고. 다음에 같이 가보자."




(몇 년 전)

독일 현지에서 한인 교민의 사고 소식이 보도된다.

Ballerinas Park Ji-yeon hatte einen Autounfall und ihr Leben ist in Gefahr.




운전대를 꼭 쥔 지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보영은 왜 고수하던 향수를 바꾸려고 하는지 끝까지 묻지 않았다. 그건 지연도 마찬가지였다. 늘 대화가 끊이지 않았지만 조사와 연결만 이야기하는 느낌. 침묵은 가장 시끄럽고 수다스러운 이야기.


"갑자기 텐션이 엄청 떨어졌네. 어, 저기야 저기. 내가 알려준 가게."




(며칠 후 태현의 집)

"연초에 들른다는 걸 이제야 왔어요, 엄마."


"바쁜 거 다 아는데 뭐..취업도 했다며?"


"네, 그렇게 됐네요."


"뭘 그렇게 미안해하면서 말해? 우리 태현이도 잘했다고 그럴 거야."


태현이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엄마'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듯했다.


"태현이가 그러더라. 시험에 떨어지고 떨어졌을 땐 조금만 하면 같았는데 다섯 번쯤 떨어지면 그땐 절망도 희망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빠진다고."


애매하다는 설명하기도 살아내기도 애매해지는 것이라서 현실감각이 얼얼해진 곳엔 오히려 좌절이 발 붙일 곳은 없었다. 애매한 세계는 안락해. 행복하진 않아도 간신히 불행은 모면하지.


"시험에 합격해고나선 괜찮아진 줄 알았어. 근데 아니었나 봐."


"......."


"그날 태현이 그렇게 되고 한참 지나서야 정신이 나서 같이 사고 났던 여자분 찾아보니 발레리나였다는구나. 그 뒤로 영영 발레는 못 하게 된 것 같고."


"네?........"


"요즘 일은 어때? 할만해?"


"........."


넋 나간 듯 멍해진 보영의 어깨를 흔든다.


"얘, 너 왜 그래? 괜찮아?"


"아, 제가 갑자기 떠오른 게 있어서요...죄송해요. 음, 오래 준비해서 얼떨결에 붙고 나니 한동안 정신없이 일만 했는데 이젠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하긴 해요."


"보영아,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태현이 몫까지 잘 살아야 한다든가 하는 미련한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지연아, 주소 찍어줄게. 여기로 와."


보영과 지연은 기기 앞에 선다.


"어때? 먼저 해볼래?" 보영은 자신이 망설였던 구간에서 지연의 표정은 어떨지 궁금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어떻게 이 애매함을 극복하고 사는 걸까.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데 대단한 단어 사용법이 있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향수 하나쯤 바꾼다고 눈앞의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어떤 시간은 말보다 향기기억될 테니 적어도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바꿔나가고 싶었다.


"미래 버튼 누르는데 깜짝 놀랐잖아. 누르는데 자꾸 자꾸 내 얼굴이 커지는 거야."


줌인 기능을 '얼굴이 커진다고' 표현하는 지연을 보고 보영은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유' 버튼을 누른 후부터 지연은 어느새 몰입한 모양이었다.


"흠, 과거의 선택을 긍정할 것..."

"일단 [OK] 눌러봐."


보영과 지연은 이유의 세계에 진입했다. 설득도 납득도 되지 않던 시간을 거쳐 여기까지 왔을 사실 이유 없이도 살아졌지만 그래도 버튼 앞에서 진지해졌다. 시뮬레이션 구간에서 지연은 분주해졌는데 감각 경험마다 온갖 사례를 추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세하게 적어 넣으면 잘 어울리는 향수를 추천해 준대."


지연은 에드가 드가의 <발레 수업> 그림을 선택했고, 보영은 하와이안 훌라 댄스그리듯 적었다. '손 끝메시지를 담은 듯 팔은 유연하게 골반은 양 옆으로 흐느적흐느적 살랑살랑 흔든다.' 저번에도 시각, 청각, 미각까지는 거뜬했었지. 후각 버튼 앞에서 둘은 숙연해진다.


"우리 훌라춤 배우러 갈래?"

"근처에 가르쳐 주는 데가 있어?"

"아니? 몰라, 있을지도 모르지. 근데 좀 멀리 가고 싶어."




태평양의 진주라 불리는 이곳엔 활기가 가득했다.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광활한 해변에는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었지만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면 바람이 살랑살랑 몸을 간지럽혔다. 스노클링에 빠진 사람들은 산호초와 열대어 구경에 한창이었고, 카후쿠의 새우 트럭은 갓 잡 신선한 새우 요리로 인기 만점이었다.


지연은 훌라 클래스를 열었다. 소수 인원만 받는 집중 클래스. '여전히 자유로운 춤을 추는 꿈' Hula Girls!


"보영아, 너 그때 나한테 훌라춤 배우자고 한 거 그냥 한 말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 요즘 너무 좋거든. 발레 그만두고 나서는 그냥 어떻게 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은 다 기억을 하고 있더라고."

"다 살아있어. 안 죽고, 그치?"


둘은 각자 버텨온 시간을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남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얘기하겠지만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보영은 태현을 마음속에서 지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그래야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행복해하는 지연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떤 향은 연하지만 깊게 남아 떠나지 않는다고.


그냥 품는 거지. 은은한 향으로. 구태여 떼어내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냥 좀 약해지면 약해진 대로. 느슨하지만 끊어지진 않을 거야.







*

별이 보이지 않는 밤에는 / 꿈꾸는 거야

눈을 감고 / 이름도 없는 것 같은 꽃이

생명을 떨치며 피어 있어

대지의 빛을 / 끝없는 꿈을

태양에 키스를 / 변함없는 눈동자를 

*









*영화 <훌라 걸스>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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