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적한 일요일 아침, 우리들은 데리언 니 그리파의 <목구멍 속의 유령>를 읽고 모였다.
페이지만큼의 인덱스를 붙여온 독자(이후 '인독'으로 통칭), 시간이 없어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이 책이 몹시 와닿았다는 번역가 독자(이후 '번독'으로 통칭), 이 모임을 열어 우리를 불러 모은 신유진 작가, 혼자 읽는 독서에 익숙해서 독서모임이 처음인 나, 타 지역에서 오는 열정을 불사른 독서모임 덕후(이후 '열독'으로 통칭), 유일한 남자 독자(이후 '유독'으로 통칭). 그 구성도 참 다양했다.
나는 내 앞에 사람들과 어느 정도 닮은 것 같았다. 우리 여섯 명을 들썩이고 수다스럽게 한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여성의 텍스트란 무엇을 말하는가?
여성이 쓴 텍스트
여성에 관해 쓴 텍스트
여성만이 쓸 수 있는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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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여성의 텍스트, 또한 애가caoineadh이기도 하다. 장송곡이자 노동요, 찬양을 위한 송가, 노래이자 통곡, 애도이자 메아리, 합창이자 성가다. 함께하라.
<목구멍 속의 유령>, 14
우리는 각자의 생각을 가감 없이 뱉어냈다. 열독은 우리가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하자 노트를 꾹꾹 눌러 편 뒤 반듯하게 적어나갔다.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신유진 작가는 우리에게 자주 질문을 했지만 초면에 얼어붙은 공기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인독의 심상치 않은 인덱스들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인독: 음, 여성의 텍스트란 여성에 관한 텍스트 아닐까요?
다들 끄덕였다. 여성이 쓴 텍스트라는 가장 흔한 정의에서 한 발 나아간 것 같았다.
우리의 침묵이 계속되자, 신유진 작가는 당황한 듯 웃으며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울분과 초조, 시간 없음'의 특성을 띠는 텍스트. 그건 여성의 텍스트가 가진 특징 중의 하나라고. 페미니즘 문학과는 또 다르다고.
우리는 갓 구운 피낭시에와 파베브르통, 맛있는 커피가 앞에 놓인 걸 잊고 이야기에 빠져버렸다. (물론 카페 르물랑의 피낭시에를 먹기 위해 독서모임을 다시 열어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할 지경이었지만 말이다.)
시인인 저자가 자아를 드러내지 않고 18세기 시인 아일린의 삶에 대해 연구자이자 전달자로서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내 곁에 남은 건 하나뿐이다. 절대 나를 떠나지 않는 하나의 목소리. 아일린 더브. 종이 위에 내려앉은 잉크처럼 가깝고, 조용한 맥박처럼 변하지 않는 것. <목구멍 속의 유령>, 79
언제든 다시 던져도 좋을 질문 세 가지
1. (페미니즘과는 다른) 여성의 텍스트란 무엇인가?
2. 나를 불편하게 하는 텍스트/질문은 뭘까?
3. 내가 나이게하는 욕망은 무엇인가?
인독: 무라카미 하루키는 절대 쓸 수 없는 글이 있죠. 와인을 마시거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거나, 클래식을 즐겨 듣는 여유로운 삶에서는 절대 쓸 수 없는 글 말이에요.
번독: 맞아요, 저는 아이는 없지만 육아하면서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열독: (정신없이 받아 적다가 움찔한다. 독서모임 덕후답게 자신의 토크 분량을 챙긴다.) 저는 페미니즘이 아닌 여성의 텍스트가 뭘까? 그건 어떤 글일까? 그게 읽는 내내 궁금했고 멤버분들이랑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인독: 정작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여자라는 걸 자주 깨달아요.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민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저를 교실로 끌고 가서 2시간 정도 상담을 해야겠다고 말씀하신 분도 있었고, 여자니까 일 제대로 못하면 여자라서 못했다는 말 들으니까 잘하라는 조언도 들은 적 있어요.
인독의 울분은 주변의 공기를 한결 더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독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옅지만 분명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자신을 국어교사로 소개한 유독은 방금 개인전을 마치고 온 작가의 외모를 갖추고 있어서 모두들 그의 사생활과 더불어 이 책에 대한 소감이 꽤나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시종일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듣고 있던 그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들이 흘러나왔다.
유독: 이 책의 구절에서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어요. 여성의 텍스트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고 싶고요.
그는 심지어 우리가 핵심적으로 다룬 소재에 대해서도 전혀 듣지 않은 눈치였다. 어린 딸을 키우는 따뜻한 아버지의 면모를 보이면서 서늘한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우리는 열띤 대화를 일단락 짓고 각자의 일정대로 자리를 뜨기로 하고 시간이 되는 사람들은 대화를 이어갔다.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시작되어 비비언 고닉, 아고타 크리스토프, 리베카 솔닛...끝도 없이 이어졌다. 신유진 작가는 내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물질적 삶>을 추천했다.
<목구멍 속의 유령>은 시적 은유, 묘사, 편집 모두 아름답지만 여성조차 여성에 대해 편협한 시선과 감정들을 갖고 살아간다는 점, 그리고 각 여성의 삶 또한 각자 정의한 '무엇이 여성을 여성이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각자가 얻은 답일 뿐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놀라움의 연속이다.
화Anger 대신 화염Flame을 심어준다. 의미 있게 타오르는 불꽃. 나 자신, 그리고 서로의 욕망을 목격하는 것에서 나아가 기록하고 전하는 것의 가치를 확인한다.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마음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의 마음 상태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도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던이나 벤 존슨, 밀턴과 비교해 볼 때- 거의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원한이나 악의, 반감이 우리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가를 상기시키는 어떤 '계시'에 의해 방해받지 않습니다. 항의하거나 설교하려는 욕구, 자신이 받은 모욕을 공표하거나 원한을 갚으려는 욕구, 세상을 자신이 겪은 곤경과 불만의 증인으로 삼으려는 욕구, 그 모든 욕구가 그에게서는 불타올라 소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이 흐르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작품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가가 있었다면 그건 바로 셰익스피어였습니다. 다시 한번 서가를 보면서 생각하건대, 만일 방해받지 않고 눈부시게 타오를 수 있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마음이었지요.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이 온전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이 권력이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도 어느 정도 유효한 것 같다고 느낀다. 항의하거나 가르치고 싶은 욕구, 모욕이나 원한을 되갚으려는 욕구, 자신의 곤경과 불만을 세상의 탓으로 돌리려는 욕구. 어떤 것이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방해 없이 눈부시게 타오르는 글이 많이 나오기를. 나도 그렇게 쓸 수 있기를. 자기만의 방이란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되찾는 것이라 믿는다.
두 종류의 힘, 즉 남성적인 힘과 여성적인 힘이 우리 인간의 내면세계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남성의 두뇌에서는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보다 우세하고, 여성의 두뇌에서는 여성적인 것이 남성적인 것보다 우세합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정신적으로 협력할 때 우리는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남성이라 하더라도 자기 두뇌의 여성적인 부분을 사용해야 합니다. 여성도 또한 자기 내면의 남성적인 부분과 교섭을 가져야 하지요. 콜리지가 위대한 마음이란 양성적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 콜리지가 언급한 양성적 마음이란 타인의 마음에 열려 있고 공명하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감정을 전달할 수 있고, 본래 창조적이고 빛을 발하며 분열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여성적, 남성적이란 단어를 영단어의 뜻으로 말하게 될 때, 나는 아이들 모르게 움찔한다. 언어란 잡히지 않으며, 지배하고, 변한다. 바깥세상에 나가서 '여성적으로' 사는 것에 대해 매몰되지 않기를 바란다. 여성의 텍스트란 무엇인가? 이것은 단지 글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아이들이 살아나가야 할 세상에 대한 질문이다. 분열되지 않고 분리하는 마음이다. 제대로 분리하면 오히려 제대로 통섭할 수 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잘 전달하고 창조할 수 있다. 본래의 빛을 낸다. 구애받지 않고 빛을 낸다.
지금 내가 내는 속력은 아주 최근의 발명품이다. <목구멍 속의 유령>, 221
같은 여성일지라도 삶의 방식이 다르므로 텍스트의 톤은 각기 다를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다시 읽고 나니 자기만의 방이 가진 크기가 다를 것이라는 표현을 할 수도 있겠다. 돌봄의 주체로서의 여성, 자기 삶의 주체로서의 여성, 혹은 또 다른 방식대로 사는 여성. 하나이거나 여럿에 해당하는 여성의 텍스트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