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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Feb 12. 2024

여리의 귀여움과 까칠함

여리는 30대 중후반의 남성으로서 사회적 젠틀함과 개인적 귀여움을 고루 갖추었다. 나를 얼탱이나 힝구로 별명 지어 부르기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애칭을 만들어 부름으로써 한층 더 좋아하게 되는 마법에 대해 익히 알고 있어서 불리는 순간 나는 철저히 새로운 정체성으로 변모한다. 부캐가 많은 것은 삶을 영위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에게는 내가 하는 말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면서 결국 동의하는 말로 마무리 짓는 독특함이 있는데 이를 테면, 우리가 고양이를 서재에 들이는 일에 대해 똑같이 부담을 느끼는 대목에서 내가 "난 고양이가 내 책을 뜯어먹을까 봐 들일 수 없어."라고 말하고 그도 동의하는 시점에서 "아니, 나는 털이 날리는 걸 견딜 수 없어서야."라고 말하는 식이다. 나는 방향이 같으면 결국 같은 이야기라고 말하고, 그는 엄연히 다르다고 말하는 식인 것.


내가 이미 이해한 일에 대해 구태여 장광설에 가까운 예를 들어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투명성 편향이 있어서 내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그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 버려서 '이제 다 이해했는데 예를 왜 또 들지? 중복이야."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말을 길게 하는 걸 좋아해서 내가 중간에 질문이라도 하게 되면 말을 꺼낸 사연에 대해서 나중에서야 겨우 듣게 된다.


여리는 남사친들에게는 '이 새끼 저 새끼'라는 말을 영어의 유노 You know처럼 쓰고, 공공기관이나 음식점에 들르면 버터 가득한 젠틀함을 보인다. 컨디션이 좋을 땐 그 느끼함이 상당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애인인 나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귀여운 말투를 쓰는데 이를 테면 '점시미는 어떠케 하셔떠?'와 같이 받침을 생략하고 된소리와 비음과 유음을 섞어 쓰는 식이다. 물재테크에 관해 말하거나 정색할 때는 국어사전이 따로 없다.


그는 가끔 세상에 이해할 수 있는 사물과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 때가 있는데 내가 알던 귀여운 여리는 온데간데없고 성질 고약한 양반이 되어 있다. 처음엔 당황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궁금해졌다. 그렇게 된 상황과 이야기가. 여리가 싫어하는 단어와 말투와 표정을 삼간다. 어떤 말과 행동을 귀여워하고 어떤 말에 마음이 동하는지도 알고 있다. 요즘은 까칠함 뒤에 자꾸 사과를 잘해서 어리둥절하다. 점점 동그라지고 귀여워지는 것은 소화불량이 되도록 먹거나 침대에 청순하고 하얗게 될 때까지 누워 자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간은 아주 많은 이야기를 선물한다. 오늘로부터 몇 년 후 몇 개의 문단을 더 쓰게 될까 상상하니 이 인물 탐구의 효용과 즐거움이 상당해서 이 글을 끝내기도 전에 누구를 또 탐구해 볼지 머릿속으로 찾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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