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방법은 화살이 바닥났을 때 자기 몸을 과녁에 던지는 것이다." 에머슨
처음부터 화살은 없었다. 내 몸뚱이 하나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십 대, 이십 대, 삼십 대를 살아오면서 내 마음속에는 '상처와 활'*의 개념이 남아있다. 성장기와 청년기의 방황은 오롯이 텍스트에 담긴다.
*'상처와 활'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필록테테스의 이야기다. 뱀에 물린 상처 때문에 버림받았던 그는 뛰어난 활 솜씨로 결국 복권된다.
다만 그 곁에 읽을거리가 있었다. 읽다가 마음껏 쉬었다가 한참을 걷다가 다시 멍해졌다가 그렇게 돌아오는 일의 반복.
울고 싶어지는 날은 읽고 싶어지는 날이었다. 책 읽기 좋은 시절이었다. 어떤 도구도 필요 없고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장 바쁜 날은 10분의 여유가 생길 때를 대비해 얇지만 인덱스가 덕지덕지 붙은 책을 챙겼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은 혼자 고요히 앉아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책을 폈다.
책은 어쩌면 고르려고 책장 앞에 서는 순간 제 몫을 다 하는지도 모른다. 걷기를 실행에 옮기려고 운동화를 신는 순간 걷을 때의 기분을 미리 느껴버리는 것처럼, 읽으려고 다가가는 걸음부터가 독서다.
사람들은 자꾸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제멋대로 해석했고, 자주 서운해했으며, 사랑을 말하면서 거짓말도 곧잘 했다.
아이들은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루에 수많은 아이들을 만나면서 뻔한 설정과 길고 지루한 플롯에 지치기도 했지만 덮을만하면 낯선 발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녀들을 위한 글을 쓰고 싶다. 그건 나의 십 대를 비롯해, 나의 십 대를 떠올리게 하는 소녀들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이다. 어떤 글이든 편지로 쓰면 다정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져 어떤 말이든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존 홀은 책 읽기에 적절하지 않을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식사 후처럼 몸이 소화에 여념이 없을 때는 책 읽기가 불쾌하다. 밤처럼 휴식을 찾아 축 처지기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는 점액, 체액, 담즙이 많이 나온다. 버튼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개 통풍, 감기, 비염, 악액질, 소화불량, 시력 저하, 결석, 산통, 변비, 어지럼증, 결핵으로 고생하는데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생기는 병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마르고, 윤기 없고, 혈색이 안 좋으며, 재산을 탕진하고 유머를 잃으며 많은 경우 목숨까지 잃는데 터무니없는 고생과 엄청난 공부 때문이다."
요즘에는 책을 읽느라 건강을 망치고 인생마저 망가뜨리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먹는 케이크는 몸을 망가뜨릴 수 있다. 아침, 저녁으로 읽느라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몸이 휴식을 취해야 할 때조차 미간에 힘을 주며 읽기에 집중하는 사람은 소화불량을 겪거나 염증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모두가 독서의 계절은 가을이라고 하지만, 겨울만큼 책 읽기 좋은 계절도 없다. 봄에는 나가 걸어야 하고 여름에는 물가를 걸어야 하며 가을에는 낙엽 위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이란 곁에 더 나은 풍경이 없을 때 찾아 읽는 것이다. 그러나 책 속의 풍경만큼 다채로우면서 인내심이 넘치고 도발적이면서 관대한 것은 없다는 점은 새삼스럽다.
'독서하는 처녀', 벨베데레 박물관, 1850년, 캔버스에 유화, 프란츠 아이블
*큐레이터 노트: 읽기에 대해 쓴 글을 읽기. 지독한 사랑.
*오늘의 글: 홀브룩 잭슨, <애서가는 어떻게 시간을 정복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