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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책이라 아쉽거나 모르는 책이라 좋았거나

독서 에세이스트는 왜 쓰는가

by 뭉클


시중에 나온 독서 에세이의 후기들을 읽어본 적이 있다. 독서 에세이는 일반적으로 특정 주제로 묶은 일련의 책들과 그에 대한 작가 자신의 관점을 닮아내는데 이런 책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대부분 모르는 책이어서 아쉬웠어요.

모르는 책들이 많아서 오히려 좋았어요.

책에 대한 감상은 공감하기 힘들었어요.

한국 독자들에게 잘 맞는 책인지 모르겠어요.


독서 에세이는 왜 읽는 걸까. 독서 에세이스트는 왜 그리고 무엇을 써야 할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최근 지역 책방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게 되면서 내가 사는 지역과 그 주변 지역에 있는 작지만 알찬 책방들의 큐레이션을 소개하는 글을 써볼까 했다. 그러다 그 책방의 큐레이션을 담아내는 독서 에세이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손품에 발품까지 드는 일일 것 같지만, 각 책방의 큐레이션을 깊이 있게 즐기는 방법일 될 것 같기도 하다.


나의 경우엔 독서에세이를 읽으면서 읽을 것들이 증식하는 기쁨을 느끼는데 책을 읽고 싶어 지게 만드는 책들은 그런 기대를 충족시킨다. 모르는 책들이 많아서 오히려 좋아지는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모든 서평에 공감하지도 않고 어떤 책은 마지막까지도 궁금하지 않다. 독서 에세이는 책 소개가 아니라 관점을 드러내는 글이므로 독자는 반드시 저자의 관점과 태도에 찬성하거나 공감을 표하지 않아도 된다. 거꾸로 말하면 비난할 필요도 없다. 건전한 비평이라면 무방하겠지만.


그럼에도 종종 무례한 발언들을 맞닥뜨린다. 동, 서양 문화나 세대 간 갈등은 차치하고 우리가 감정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주제들은 생각보다 많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잃어버린다. 하소연하고 싶은 삶에서 누군가의 말을 진득하게 듣고 있는 경청의 능력은 귀하고, 표현을 다듬어 건네는 능력은 더 귀하다.


오늘은 아이들과 수업보다 상담을 더 많이 하는 바람에 하루치 기운을 다 뺏겨버렸다.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이 서로를 너무 좋아하고 너무 싫어하는 모습을 보면 인생의 굴곡을 견뎌낸 어른들은 '기운이 넘쳐서 힘들겠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관계 속에서 완급 조절을 하는 일은 아이나 어른이나 정말 어렵다. '맞지 않는 서로를 견디는 건 정말 힘들구나' 느끼면서 독서 에세이가 더 다양하게 나왔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누가 다 읽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책은 그냥 책 자체로 읽혔으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 그 자체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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