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는 멀리 간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더 멀리 간다. 일전에 비비언 고닉의 글을 읽고 남긴 피드에 누군가 들른 기록이 있어 재방문했을 때 느꼈다. 나는 이제야 내가 남긴 글의 주인이 되었다고.
■ 사실, 거리 두기 없이는 이야기도 있을 수 없다. 묘사와 감응은 있겠지만, 이야기는 없다. 《상황과 이야기》, 17
■ 나는 존재가 아닌 부재를 묘사하고 있구나. 이것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 난 언제나 아버지가 나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아버지를 알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그러고는 깨달았다.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구나. 《상황과 이야기》, 25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그 감정에 압도되어 몇 년을 살아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때의 감정에서 헤어 나오느라 꽤 잦은 악몽과 자기 이해의 시간을 거쳐야 했는데, 어쩌면 거리 두기의 과정 아니었을까. 사라지지 않는 기억, 눈앞에 생생한 사건, 나도 몰랐던 내 감정들을 어떤 상황이나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는 건 아주 멀리서 오래 보았다는 뜻이다. 시간의 흐름, 노력 둘 중 어느 하나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일.
■ 더 차분할 땐, 그런 흐름이 바로 상황임을 볼 수 있다. 자기 방어 심리에 사로잡혀 마구 휘돌기를 멈추고, 온전히 내 것은 아닌 어조와 구문, 관점을 채택하여 초점을 맞춘다.《상황과 이야기》, 32
사람책을 애정한다. 수천 수백 권의 책을 읽는다 해도 내가 독자라는 사실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군가는 나를 오랫동안 바라본 세월만으로도 나에게서 많은 것을 읽어낸다. 그들만이 내게 다른 어조와 관점을 가르쳐 줄 때가 있다. 귀를 더 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에세이를 거울삼아, 인정하기 두렵고 창피한 일을 마주하는 어려움을 비춤으로써 서서히 더 깊은 통찰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 이해에 도달하기를 꺼린다는 진실 말이다. 《상황과 이야기》, 57
<모르는 것을 쓰기> 매거진에 틈틈이 글을 쓰면서 나는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낙하해서 바다 표면에 겨우 도달했다. 그 바다의 수심이 깊을지라도 마음의 뼛속까지 발라먹는 고소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느낀다. 글쓰기는 나를 안전하게 그곳까지 데려다줄 것이다.
■ 롤스조차 고대부터 지금까지 정치적 역사가 줄곧 우리의 공포를 서로의 공포가 아닌, 상대에게 투사된 우리 자신의 공포로 비춰준다는 사실을 적절히 지적하지 못한다. 《멀리 오래 보기》, 140
■ 프롬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와 자유의 책임을 피하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왔음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멀리 오래 보기》, 156
상대에게서 겪는 공포들, 이불속에 꽁꽁 숨어서야 겨우 상상해 볼 만한 기괴한 에피소드가 사실상 내 안에서 발현된 것이라면 이제부터 내 삶의 과제는 나를 닮은 사물들을 오래 톺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로, 돌아오는 길.
비비언 고닉이 내게 해준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