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특별한 빨강 날개, 앤 카슨 1

알레르기와 통증의 재해석

by 뭉클






#1 앤 카슨은 기원전에 살았던 시인 스테시코로스의 작품 중 '게리온 문제'라 불리는 서정시를 자기만의 시소설로 풀어낸다. 빨강 날개를 단 게리온의 자서전이 1만 2천 원인데, 도미노 피자가 3만 원이 넘는 이유에 대해 밤새 궁금해했다. 에리테이아 Erytheia라고 불리는 섬에서는 소떼도, 날개도, 바람도, 풍경도, 새벽도 모두 빨갰다.


헤라클레스에게 살해당한 게리온*은 글을 알기도 전부터 자서전을 썼다. 어머니의 지갑에서 빳빳한 종이를 찾아내 머리카락으로 쓰려고 잘게 찢은 후 그것들을 토마토 위에 붙이는 식으로. 어떤 좌절과 통증은 이해할 수 없고 견뎌지지도 않아서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들의 거리감과 근원성에서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든 현재의 빨강으로 돌아와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 이런 장르, 이런 캐릭터 괜찮을까? 괜찮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세계에서는 존재가 안정적이고 특정성이 전통 속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다. 호메로스가 피를 언급할 때 피는 검다. 영자들이 등장할 때 여자들의 발목은 단아하거나 반짝거린다. 포세이돈은 늘 포세이돈의 푸른 눈썹을 지녔다. 신의 웃음은 억누를 수 없다. 인간의 다리는 빠르다. 바다는 지칠 줄 모른다. 죽음은 나쁘다. 겁쟁이의 간은 희다. 9



#2 어떤 실체는 기호에 불과해서 언제든 바꿀 수 있는데도 우리는 이내 망각한다. 우리에게 특별한 괴물성이 있다는 사실을 소화하지 못하고 급체한 인간들은 자유와 무책임을 혼동한다. 나는 너희를 풀어주리라. 그러니 너희에 대한 책임도 물론 없고.


#3 앤 카슨이 스테시코로스와 인터뷰를 했다고 해서, 나는 에밀리 디킨슨과 인터뷰를 준비 중이다. 한 번쯤 꼭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묻고 싶은 게 참 많다. 작품 번호 1748은 여기에도 실려 있으니 인터뷰 중에 앤 카슨을 잠시 영상통화로 소환해도 좋겠다.


게리온을 보면서 싱클레어 생각이 났다. 왜일까? 헤라클레스를 만나 '삶의 세계가 몇 눈금 하강'한 게리온을 보면서 데미안의 빈자리를 느꼈다. 헤라클레스가 게리온을 죽인 이야기를 두 소년의 사랑과 실연으로 풀어내서 그런가. 정말, 왜일까?




다른 인간과 대립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들이 명확해진다. 62



하지만 게리온은 자신의 고통만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는 무릎 위의 책을 보았다.

《철학적 문제들

"...... 나는 당신이 빨강을 어떻게 보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고 당신도 내가 빨강을 어떻게 보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의식의 분리는 소통의 실패 이후에나 인식되며, 우리가 취해야 할 첫 번째 행동은 우리의 분리되지 않은 존재를 믿고......" 게리온은 책을 읽으며 자신의 깊숙한 곳에서 엄청난 양의 검은 마그마가 들끓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172-173




으. 지긋지긋.


#1748

앤 카슨이 나보다 먼저 에밀리 디킨슨을 만났다. 버지니아 울프의 편지도 벌써 읽었다. 에밀리 디킨슨을 만나면 내가 찍은 사진과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꼭 에어드롭 AirDrop 해야지. 스테시코로스와의 인터뷰를 보다가 눈이 빨개졌다. (아, 원래 눈은 빨갛지.) 눈이 보라색으로 변했다. 인터뷰가 맘에 들어서 그날 밤 일기를 쓰다 잠들었다. 그 일부.


... 실명에의 의지. 먼저 '보는 것seeing'부터 말하려는 것은 실명에의 의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의 통증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다. 내가 본 건 맞지만, 내가 본 건 그게 아니야, (혼란), 내가 봤으니까 모두가 본 것(그러니까, 본질) 그것이 너무 좋아서 눈을 깜빡 거리는 시간조차 아까운 시절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이해가 안 가서 변화가 아니라 변신(그러니까, 벌레)이 되는...


빨강은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아니, 기대하지 않는다.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불안은 무

죽음은 나쁜 것


빨강 인내

빨강 날개

빨강 일기


다음에 또 만나고 싶은 사람, 앤 카슨.









*헤라클레스의 12 과업 중 하나가 게리온을 죽이고 그의 소떼를 빼앗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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