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워크숍 노트 #2

글아 글아 뭐가 보이니?

by 뭉클



기침이 첫 워크숍 즈음 심해져서 두 번째 워크숍 직전에 눈부시게 나았다. 억지 같지만 이 시간은 여러모로 내게 나아가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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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워크숍에선 민음사 시집 중에서도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들을 읽었는데 그 시들은 말의 힘, 말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 도발과 패기, 기존 구조와 관념을 전복시키려는 힘이 감정의 동요보다 더 컸다. 이번 워크숍에는 주로 문학과 지성사의 시집을 다루었는데 개념적 사유와 언어 실험적 모먼트가 있다는 점에서 결이 좀 달랐다. 시인은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감탄보다는 말을 보태고 싶어지는 시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현대시의 전반적인 경향에 있어서는 궤를 같이 했다. 공감을 얻으려 하기보다 사유와 질문으로 가득한 시. 시가 아니려고 하는 시들의 모음. 지난 시간만큼이나 현대미술에 관해 자주 이야기 했다. 문학을 다루면서 가장 빠른 예술인 영상이나 예술작품에 대해 먼저 말을 하게 된 것은 시인들이 작품 전시 같은 시들을 써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학은 언제나 가장 늦는다고 시인이 말했고, 나는 그만큼 가장 오래 남는 것도 문학 아닐까 생각했다.)


김리윤의 『투명도 혼합 공간』속 관념과 개념을 다시 건축하는 재세계 Reworlding를 이해하려면 현실에 대한 세팅을 이해해야 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거나, 현실감 없게 아주 아름답게만 그려내어 진짜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서정성을 듬뿍 담아낼 수도 있지만, 서정성은 1도 없고 깊이 없는 로봇과 유령의 세계를 그려내면서 서정성에 대한 갈증을 키울 수도 있다. 내게 김리윤은 후자에 가깝다.


시인은 같은 현실을 살아도 다른 인식으로 글을 써낼 수 있다고 했다. 가난하거나 잦은 이주 등으로 변화와 풍파가 많은 삶을 살았어도 계급성, 정치성, 육체성이 드러나는 글을 쓰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작가도 있다는 것.


아니 에르노

엘프리데 옐리니크

뒤라스

이상

배수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유튜브의 영상을 만지작만지작 위아래로 스크롤을 올리는 작은 손을 보고 있자면 나무에 대해 쓴 시를 읽고 '나무'라는 글자나 '나무를 찍은' 사진 외에 아이패드 속 나무 영상이나 인공지능이 그린 나무 그림으로 나무를 이해하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건 진짜 나무일까. 우리는 같은 나무를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나. 그런 감각과 감성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낼지.


김리윤의 시집 속 투명도가 짙은 존재들은 종종 로봇이나 유령 등으로 치환되며 언어는 자꾸 미끄러진다. 우리가 자연이라 부르는 것은 인위성을 가진 채로 새로운 자연으로 재탄생되고 인간성, 인간미 없이도 인간다움을 의심받지 않는다. 투명도는 혼합된다. 우리 각자는 N개의 감각으로 주도 객도 없이 여기저기를 떠돈다.


AI가 "이것이 바로 자연입니다." "인간다움에 대해 설명해 드리죠."라고 떠든다면 "네가 뭘 알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깊이 있는 인식론 또한 N개의 감각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투명도가 혼합된 공간에 산다.


15분 합평 시간에 우리는 각자의 갤러리에 들어있는 캡처와 밑줄 그은 인용구, 사진 등등을 모아서 왜 그걸 가져왔는지 간략하게 설명하는 시간을 보냈다. 10명에 가까운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 누구도 같은 텍스트나 비슷한 감상을 내놓지 않았다. 트위터, 에세이, 소설, 시, 사진 등등 우리는 실제로 투명도의 혼합을 체감했다.


몸 없음.


우리가 진정성, 생태 민감성, 자연에서 느끼는 감정적 동요 등으로 느끼는 깊이 있는 세계는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다. mbti, ootd, 혈액형 등 여기저기서 인용해서 나열한 세계들로 즐비하다. 패치워크가 생활. 역사와 전설을, 과거와 현재를, 현실과 꿈, 논리적 현실과 형이상학적 실체를 덕지덕지 연결하던 작가들이 떠오른다.


올가 토카르추크

앤 카슨


연재를 끝마칠 즈음, 왜 소설이나 에세이보다 시를 택하게 되었는지 새삼 다시 깨달았다. 원래 시를 좋아했던 것과 별개로 시는 어느 짧은 단락으로도 소설의 뭉텅이 서사를 대체하는 힘이 있었다. (소설의 매력은 소설만의 것이니 비교불가겠지만.) 누군가에게 장황한 설명 없이도 소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그런 류의 글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자꾸 써오기도 했지만 요즘 세대와 소통하는 데에도 시 특유의 효용이 있다는 것. 분명해졌다.


나는 카프카의 시에서, 엘렌 식수의 글에서 각각 시간차로 '낯섦'에 꽂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두 글을 골랐다. 늘 낯섦을 피해 도망치면서도 낯섦을 갈구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와, 이거 진짜 재밌다. 시인은 자신이 고른 텍스트가 자신을 설명할 거라고 말했다. 자신과 정말 다른 것을 보면서 자신을 알게 된다고도 했다. 어쩜 우린 이렇게 다를까.


시인은 우리가 아마추어라서 재밌다고 했다. 어떤 목적이나 의도로 내용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정념, 감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내 이야기를 한다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거는 게 프로라는 걸까 짐작했는데, 올가 토카르추크의《방랑자들》을 읽다 이 구절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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