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어 바깥에서 찾은 정체성
왜 쓰는가? 에 대한 자신만의 답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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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곧 외침은 아니다. 그러나 글이 외침과 완전히 떨어져 버리면 더 이상 문학이 아니다. 글과 외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두 단어는 언어학적으로 어원이 같은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살아온 과정에서 이제는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결합된 것이다.
나의 첫 외국어 '영어'와의 만남은 문학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게 영어가 아니라 독일어나 스와힐리어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모어* 밖의 언어이면 되기 때문이었다. 외국어라기보단 모어가 아닌 것, 그러니까 언어 밖으로 나와 다른 언어로 점프하는 걸 좋아하는 것이었다.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의 여행.
*태어나서 처음 익힌 말을 뜻하며, 모국어와 다를 수 있다.
지독하게 팍팍하고 억울했던 고등학교 시절은 내게 망명이나 식민지 같은 것이었는데 덤으로 외국어를 얻은 셈이었다. 다른 언어를 쓴다는 건 모어의 세계가 주는 압박에서 벗어나는 일이자 사고방식을 갈아 끼우는 일이었다. 그 쾌감과 해방감 덕택에 영어도 (나중엔 중국어도) 배웠다.
'외국에서 온 사람이 우리 언어로 글을 쓴다'라는 시점이 '외국인 문학'과 '이주자 문학'이란 말에 드러나 있다면, '나를 속박한 모어 바깥으로 어떻게 나가지? 또 나가면 어떻게 되지?'는 창작욕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모험적 발상이다. 나는 '엑소포니 문학'을 그렇게 해석한다. 모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설령 식민지 지배와 망명에 있다고 해도 그 결과로 재미있는 문학이 생긴다면 자발적으로 '바깥에' 나간 문학과 구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가만히 돌아보면 낯섦은 어색하면서도 내가 영영 놓지 못하는 것이었다. 계속 읽고 쓰는 것의 근원에는 (낯섦과 동의어처럼 보이는) 다름에 대한 외침이 있었던 것 같다. 다를까 봐 불안하면서도 다르지 않을까 봐 두려운 모순된 인간이 나였다.
그간 글을 쓰면서 탐구한 주제들은 질문, 여성, 다양성, 환경, 낯섦, 시, 소설, 문학/예술 비평, 언어, 글쓰기 등이었는데 모아놓고 보니 죄다 외침이고 재해석이었다. AI 프롬프트의 시대에 구태여 창의적 글쓰기를 하고 싶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짝꿍은 내게 여행의 테마를 정한다면 무엇이겠느냐고 물었다. 주요 관심사를 묻는 질문이었다. 무엇을 중점적으로 보겠냐며 한 가지 주제만 골라보라고 했다. 정치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짝꿍에 비해 나는 선뜻 지난 여행들에서 공통점을 읽어내지 못했는데 뉴욕, 대만, 상하이 여행의 이유와 감상을 듣더니 "문학이네."라고 했다. 나는 오래 참았다는 듯이 말을 토해냈다. "전공시간에 시랑 비평을 제일 좋아했어."
순간 모어 바깥으로만 도망치느라 내가 누구인지,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국어를 얻었지만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잊은 느낌이었달까? 망명의 언어로서의 외국어가 아니라 다양성의 언어로서 외국어를 바라보아야 함을 새삼 깨닫는다.
소설을 쓸 수 있는 형태로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는, 창고에 차곡차곡 나무 상자를 옮겨놓듯이 단어를 기억해서는 안 되고, 원래 저장되어 있던 단어와 새로운 단어가 혈관으로 이어져야 한다. 더구나 일대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한 단어가 들어와도 생명체 전체가 재조합되고 에너지가 엄청나게 소비된다. 그래서 새로운 언어를 쉽게 흡수할 수 없다.
나는 많은 언어를 학습하는 것 자체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언어 자체보다 두 언어 사이의 좁은 공간이 중요하다. 나는 A어로도 B어로도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A어와 B어 사이에서 시적 계곡을 발견해 떨어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인용: <여행하는 말들>, 다와다 요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