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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은 아침부터 크림브륄레나 쇼콜라 크로와상 따위를 커피도 없이 사들고 차에 탔다. 더운 여름, 차 속 에어컨에 몸을 식히면서 꺾일 줄 모르는 더위에 지쳐감을 느낀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부장은 태연과 사수인 연희를 불러 어제 넘긴 일에 대해 추궁하기 시작한다. 태연은 고개를 숙이고 꽤나 진지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상 딴생각을 하고 있다. 입 안에는 단 쇼콜라향이 가득하고 갈증이 밀려온다. 흘러가는 것들에 대해 갈망하면서도 정작 물도, 커피도 한 잔 마시지 못한 채 점심시간이 된다.
쉬는 시간은 없다. 연희와 이따금씩 나누는 소소한 대화가 전부. 의식적으로 이완하려고 몸을 일으켜 걸으면서 몇 번의 원을 그리지만 한낮의 태양에 익어버린 느낌이다. 의지 따위 믿는 게 아니다.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지.' 태연은 중얼거린다. 뭔가 힘주어 말하는 것조차 에너지 낭비라는 듯이.
점만 찍자. 자꾸 점을 잇고 선으로 면으로 만들려고 했던,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는 게 운명처럼 느껴졌던 시기도 있었다.
넘기는 거 아닐까. 단짝 태희는 말했었다. 일단 뭔가 넘기면 살아갈 수 있잖아. 그게 밥이든, 여름이든. 시간은 흘러가는 것도 보내는 것도 아니며 그저 삼켜 끝내 소화시키고 마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편한 쪽으로, 밝고 가벼운 쪽으로, 그래서 거창해지지 않는 쪽으로.
봄도, 겨울도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연희는 갓 일을 시작한 태연이 실수를 할 때마다 '오히려 걱정하고 준비한 일은 안 터지더라. 기지개 켜고 괜찮다 싶을 때 미처 생각지 못한 곳에서 터지지.'라고 말했었다. 눈만 뜨면 시작되는 동기들 간의 경쟁과 비교에 숨이 턱턱 막혀오던 태연은 아빠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진다. 요즘 들어 아빠의 몸이 그림자처럼 묻어난다고 느낀다. '아빠, 이럴 땐 어떻게 견뎌냈어?' 하지만 끝내 그럴 용기마저 없다고 느낀다. 아니, 피곤해졌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삶은 늘 그대로인데 내가 울타리보다 한 뼘 더 커져서 좀 더 내다볼 수 있게 되는 거라며 신은 1강이 끝나면 2강을 펴라고 한다던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확실한 몰입과 휴식 그런 게 필요했다. 권태는 지루함과 게으름 그 사이 어디쯤이며, 아주 작은 금 사이로 빛이 줄줄 새고 있을지도 모른다. 태연은 기지개를 켠다. 연희와 눈이 마주쳐 어색하게 웃는다. 등 뒤로 땀 한 줄기가 서늘하게 떨어진다.
부장의 감시 어린 눈초리는 좀 질리지만 어떤 날엔 각자의 역할극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라고 느낀다. 시간은 먹어 삼키는 동안 소화 불량이 되기 쉬우니 천천히 곱씹기보다 후루룩 삼키고 품어 천천히 소화시켜야 한다. 이야깃거리를 생각한다. 대화가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지금 바로 술술 이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가 태연에겐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일 거라고. 여름과 함께 찾아온 권태에 대처하는 방법은 오직 이야기일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