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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Aug 27. 2024

마녀 스프 일기

시*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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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퇴근 후에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꺼낸다. 토마토, 버섯, 가지 등 각종 야채와 물을 넣고 휘이휘이 젓는다. 삼십 분 아니, 최소 한 시간은 저어야 한다. 슬로우 푸드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 멍청한 K도, 한심한 H도 섞어 젓다보면 거짓 마음은 가라앉는다. 나폴레옹의 짜증과 히틀러의 불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말하는 효과를 낸다고 느낀다.



아침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노을을 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좋지 않다. 술잔을 앞에 놓고 죽음에 압도되는 것은 좋지 않다. 천장을 바라보며 죽음의 충동에 시달리는 것은 좋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단련된 마음의 근육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 다. 프란츠 카프카는 “사람들이 무언가 사진 찍는 것은 그것을 정 신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죽음에 대해 생각 함으로써 죽음을 삶으로부터 몰아낼 수 있다. 삶을 병들게 하는 뻔뻔한 언어들과 번쩍이는 가짜 욕망들을 잠시 몰아낼 수 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아침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아서 마녀는 일찍 잠을 청한다. 잠이 오지 않아도 눕기만 하면 아침이 올 것처럼 정성 들여 눕는다. 베른트 브루너의 <눕기의 기술>을 읽는다. 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 목차를 훑어보다 누운 자들의 미술관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잠들지 못한다. 시간이 별로 없는데 충분히 자야 내일 장미 봉오리를 거둘 수 있는데. 아침에 죽음을 생각하며 일어나 죽음을 생각하며 잠든다. 이 생각은 마녀를 오롯이 장미 봉오리에만 집중하게 해 준다.




 

할 수 있을 때 장미 꽃봉오리를 모아라

나이 든 시간은 끊임없이 도망치니

오늘 활짝 미소 짓는 꽃도

내일이면 시들 테니


하늘의 찬란한 등불인 태양은

아폴로가 높이 솟아오를수록

더 빨리 달음박질이 끝나고

더 일몰에 가까워지니  


첫 번째 시절이 최고인 것

젊음의 피로 뜨거울 때

소진되면 더 나쁜, 그다음엔 최악의

시간이 뒤따르니


그러니 수줍은 체 말고 그대의 시간을 활용하라

행복할 수 있을 때 행복하라

청춘은 한 번뿐이니 잃고 나면

영원히 늦는 것




_




마녀는 젊음은 영원하지 않으니 '할 수 있을 때 결혼하라'는 대목이 영 맘에 와닿지 않았는지 marry(결혼하다)를 merry(즐거운)으로 잘못 읽는다. 행복할 수 있을 때 행복하라. 오늘은 별다른 주문 없이도 금세 잠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키팅 선생님은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 외에도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는데 그게 장미 봉오리였는지 일본식 다리가 드리워진 호숫가의 수련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여하튼 그가 몹시도 그리운 밤이었다.






이른 취침이 낯설어 뒤척이다 <눕기의 기술>에서 한 구절을 소리 내어 읽는다. 지금 누워 있는가? 그렇다면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나 눕지 않을 수 없고, 종종 간절히 눕고 싶어 지니 말이다. 누운 상태만큼 편안한 자세가 어디 있겠는가? 눕는 것은 신체에 가장 저항이 적게 주어지는 자세이며 가장 힘이 덜 드는 자세이다. 우리는 누운 자세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사랑을 하고, 생각을 하고, 슬픔이나 그리움에 잠기고, 백일몽을 꾸고 고민을 할 수도 있다.(9)


되었다. 모든 준비가. 화려한 연극을 뒤로하고 한 편의 시가 될 시간이. 내일 아침엔 다시 죽음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 마녀는 내일 저녁 수프에 넣을 새로운 재료가 떠올라 내심 흐뭇하다.




*시(時)이며 시(詩)가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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