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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기보다는 나 자신이 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작가나 책을 낸 사람이 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전자가 훨씬 실용적이고 현실적으로 들린다.) 유명하고 바쁜 프리랜서가 아니라 내가 나로도 괜찮은지 실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역시나 전자가 훨씬 더 의미 있겠다.)
하지만 어떤 도시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아는 사람은 정작 그 도시 밖에 살면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몇 만 권의 책을 읽는다고 해도 결국 나의 진정한 일부는 통찰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고 타인의 빛이 반사하며 어른거리는 그림자의 모양으로 어림짐작할 수 있다는 느낌이 에세이를 쓰는 일의 뿌리로 작용한다.
나를 둘러싼 세상 이야기가 나의 피부라는 걸 감지한다. 애써 가벼워질 필요도 없고 둔탁하고 메마른 감정은 그대로 묘사하는 게 세상을 사는 내 피부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어떤 글은 일기장처럼 술술 읽히고 어떤 글은 마지막까지 수수께끼처럼 해독되지 않는 이유도 쓰는 이가 애초에 누구에게나 가닿을 멋진 문장을 쓰려고 결심했다기보다 그저 자신이 유독 견딜 수 없는, 자신을 간지럽히는 감정적 실체에 대해 탐구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듯,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 각자의 운명 속에서 하나의 점으로 만나는 것이다.
참여자의 정체성. 이 낯선 세계에 초대된, 아니 던져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공통 미션. 우린 누구고, 여긴 어디인지. 이 불확실성 속에서 끊임없이 답을 강요받는다. 그 강요자는 놀랍게도 자기 자신이고. 차라리 모르는 편이, 의미 없는 싸움에 몰두하는 편이 좀 더 제정신으로 살아가게 돕는다고 믿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골고루 주거나 모조리 뺏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종잡을 수 없다. 재능 있는 작가에게 생활고, 화재로 인한 화상, 난소암을 주었다면 그것은 재앙의 수확인지, 재능의 씨앗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허무란 땅에 끝도 없이 무언가 움트고 있다니.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듯이 허무가 먼저인지 싹이 먼저인지 알 길이 없다. 분투한 기록들은 감각적 긴장감을 주고 그것에서 삶의 이유를 찾는다. 이유는 애초에 없고 만들어진다고는 하지만.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이 바닥난 창고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알 수 없는 권태로 위태로울 지경이었으나 그즈음 내게 필요한 건 빈 창고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다른 곳간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이었다. 일종의 모드 전환. 남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던 풍요가 내게도 전이되었다. 지식과 지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분투만이 가치 있는 행위이다. 세상은 사물의 수만큼 시끄럽고 유동적이며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색으로 칠해졌다.
이제야 에세이가 시작되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