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위화는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를 둔 가정에서 자라오면서 여타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병실의 알코올 냄새와 수술실의 피비린내 나는 광경에 익숙했다. 당시 그의 집은 병원 안 숙소에 있었고 근처 화장실에 가려면 영안실을 지나쳐야 했다고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해 누구보다 자주 생각하고, 호기심에 영안실의 찬 바닥에 누워보는 경험은 어린아이가 흔히 겪는 일은 아니다.
삶과 죽음, 그러니까 인생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동시대의 작가가 점점 희소해진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자기 자신으로 침잠하는 시크하고 엉뚱하고 유쾌하고 이해는 가지만 어쩐지 외로워지는 글들을 읽다가 위화의 글 앞에서 조금 아련해졌다. 소설《인생》을 포함해 그의 다른 작품인《허삼관 매혈기》,《원청》등에서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개인의 삶이지만 시대의 운명을 읽어내는 그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필력에서 내공이 느껴지기도 하고.
'나는 《인생》이 눈물의 넓고 풍부한 의미와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9, 서문 중에서
소설 속에서 인간을 소에 비유하는, 심지어 소에 대고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이야기는 화자가 푸구이 노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형식인데,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밥벌이의 고단함을 떠올리는 이야기의 배경으로 묵묵히 일하는 소의 이미지는 꽤 어울린다고 봐야 할까? 허삼관은 아내와 아들을 위해 피도 팔았으니 그는 평민의 고단함을 표현하는데 재주가 있는 듯. 한 인간의 삶을 푸념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우호적, 낙관적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는 인상적이었다.
대대로 지주였던 집안의 푸구이는 술과 도박,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소작농 신세로 전락한다. 도박판에서 그의 집과 땅을 모두 뺏어갔던 룽얼은 대지주가 된다. 엉겁결에 끌려간 전쟁터에서도 살아남아 자신이 살던 동네로 돌아온다. 그 무렵 토지 개혁이 시작되고 사람들에게 땅을 배분하는데 푸구이에게 사기도박으로 돈을 빼앗아 갔던 룽얼은 악덕 지주로 몰려 총살을 당한다. 인생 뭘까, 운명 뭘까 생각하게 되는 지점. 현장(마을을 다스리는 사람)의 아내가 출산 중 출혈이 심해 여러 아이들이 동원되는데 그의 아들인 유칭도 수혈을 하다 죽게 되고 아니나 다를까 그 현장이 전쟁터에서 의지하던 춘성이 아닌가. 인생 뭘까, 인연 뭘까. 푸구이에겐 딸 펑샤도 있었는데 아이를 낳다 죽고, 그의 아내 자전도 병으로 죽고. 사위인 얼샤, 외손자인 쿠건도 결국, 죽는다. 푸구이 주변의 모든 가족이, 죽는다.
더 이상 밥을 지을 땔감을 구할 수 없게 됐을 때까지도, 장제스 위원장은 우리를 구출해내지 못했다네. 다행히도 비행기는 더 이상 쌀이 아니라 다빙(밀가루를 반죽하여 크고 둥글게 구운 떡으로 북방의 주식 중 하나)을 내려주기 시작했어. 보따리에 싼 다빙이 땅에 떨어지면, 국민당 형제들은 짐승처럼 달려들어 뺏고 빼앗느라 난리를 피웠지. 그렇게 달려든 사람들이 한 겹 두 겹 포개져 있는 꼴은 마치 어머니가 촘촘히 엮은 신발 바닥처럼 보였다네. 거기다 괴성까지 질러대니 이리떼와 다를 바가 없더구먼. 《인생》, 90-91
'사람은 즐겁게 살 수 만 있으면 가난 따위는 두렵지 않은 법이란다.' '가족들이 모두 죽었지만 내가 죽을 때 남은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식의 문구들이 가끔 등장하는데 나는 이런 문장들이 (루쉰이 비판했던) 아Q식 '정신 승리'와 위화의 우호적 낙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세이에서 밝혔듯이 초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시기부터 루쉰을 작가보다는 하나의 단어(마오쩌둥의 대변인이라든가)로 인식해 온 탓에 그와 연결되는 걸 몹시 불쾌해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작가 루쉰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이견은 없을 것이다.
소설《인생》이 역사소설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지만, 위화의 이야기에서 중국 근대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대약진 운동의 일환인 인민공사 설립과 토법고로 운동, 문화 대혁명, 장제스와 마오쩌둥, 그리고 루쉰.
대장이 한 말은 과연 틀림이 없었다네. 식당이 생기니까 확실히 일이 줄더군. 배가 고플 때는 줄만 서면 먹을 거랑 마실 게 생겼지. 밥과 반찬은 양껏 먹을 수 있었고, 고기도 매일 먹을 수 있었지. 처음 며칠은 대장이 밥그릇을 들고 웃는 얼굴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묻더군. "일이 줄었지? 인민공사가 좋은가, 안 좋은가?" 《인생》, 132
집안의 밥솥과 밥그릇, 간장과 소금까지 모두 빼앗아가 녹이고 식당을 열어 밥을 먹게 하지만 결국 식당도 문을 닫고 각자의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곳곳에서 '분배'의 허점이 드러난다. 공평은 평등인가?
나는 나 같은 놈이나 집안을 말아먹는다고 생각했지, 우리 대장도 그런 놈일 줄은 몰랐네. 《인생》, 138
내 한평생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 게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 내 주변 사람들을 보게나. 룽얼과 춘성, 그들은 한바탕 위세를 떨치기는 했지만 제 명에 못 죽었지 않은가.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아옹다옹해 봐야 자기 목숨이나 내놓게 될 뿐이라네. 나를 보게나. 말로 하자면 점점 꼴이 우스워졌지만 명줄은 얼마나 질기냔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가 죽으면 또 하나가 죽고 그렇게 다 떠나갔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인생》, 278-279
수용하고 화해하려는 작가의 태도에도 자조와 풍자는 빠지지 않는다. '운명은 수용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는 지혜로도, 동양적 사고로도 읽힌다. 가산을 탕진한 남편을 탓하지 않는 자전, 자식의 죽음과 관련된 전우를 받아들이는 푸구이에게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측은지심을 본다. 물론 공감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긴 하다.
그래도 주인공 푸구이가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아가며 슬픔과 상처도 회복해 가는 이야기여서 흐뭇했달까.
아쉬운 독자 시점
다만, 평민의 삶에서 용서와 화해가 반복되는 프레임이 이상적으로 느껴졌다. 용서와 용인이 왜 이렇게 손쉬운가. 그의 우호적, 낙관적 서사를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어쩔 수 없겠지만 여성에 대한 묘사도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우스꽝스럽다. 예전엔 다 그랬다지만 요즘 중국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별로 달라진 건 없어 보인다. 그 부분은 늘답답하고 불편하다. 평민 푸구이의 회고록처럼 읽히는 만큼 그의 부인인 자전의 시점에서 쓰인 에세이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인이 본 중국 그리고 인생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