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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매틱 하모니카 일기(3)

숨이 숲이 될 때

by 뭉클

이따금씩 제한된 감각으로만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정 감각이 지나치게 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놓치고 사는 감각들을 깨우는 건 삶을 (본능이 아닌) 본성대로 자유롭게 사는데 꼭 필요하다. 그 잃어버린 세계가 내겐 청각이 아닐까 싶고.


크로매틱 하모니카에 매료되어 하모니카에 입문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궁서체를 배우려고 정자와 한자 쓰기에만 몇 년을 공들여야 했던 것처럼 크로매틱은커녕 좀 더 접근성이 좋은 트레몰로를 배우느라 시간을 보냈다. 가늘고 긴 듯 하지만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연수를 찾아 듣거나 레슨 선생님이 대학원에서 평생학습수업을 하실 때도 가서 들었다.


타고난 끈기, (운동 신경만큼이나 박자 감각도 부족하지만) 악기 하나쯤은 해내고 싶다는 이상한 집념, 초심자의 열정 등등... 도 있지만 사실 배움 자체가 주는 성취감만으로도 멀리멀리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아무리 열렬해도 취미는 취미다. 일이 아주 바빠지면 레슨이 미뤄지고, 다른 취미들에 밀려 제일 마지막 순위가 되기도 하고, 동기도 재미도 없이 버티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 마침내 크로매틱을 시작했지만 동요, 가곡, 클래식 위주의 레슨은 성실함만으로는 지속하기 어려웠다. 언젠부턴가 잡고 있다기보단 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심지어, 내 생일이었던 것 같은데) 선생님이 퇴근 후에 레슨 시간까지 체크해 준 날이었는데 정작 연습도 의욕도 없는 나는 불만을 터트리는 우를 범했다. 루틴을 만들고 싶어서 여러 가지 시도(녹음을 5-10개씩 해본다든지, 시간이나 요일을 정한다든지..)를 했지만 결국 틀어지고 미뤄지면서 스스로에게 화도 나고 짜증도 나던 참이었다. 선생님도 나도 서로 다른 이유로 황당한 상황.


자연스럽게 그동안 쌓여있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나 자신조차 잊고 있던 크로매틱 하모니카에 대한 첫 마음도 상기하고. 크로매틱 하모니카로 입문하게 했던, Ella Fitzgerald의 <Misty>는 아예 엄두도 못 냈고, 그러다 아직은 즐길만한 수준이 아니라면서 스스로를 지독한 스케일 반복 훈련과 메마른 선곡으로 밀어 넣곤 했었던 시간들...


악기 연습하는 사람들도 뭐 딱히 재밌기만 하지는 않다고 했다. 그냥 하는 거라고. 선생님은 요즘 좋아하는 곡이 뭐냐고 했다. 자주 듣는 곡 같은 것. 본인이 좋아하는 곡으로 연습해야 오래 할 수 있을 거라고.


요즈음 내가 듣고 또 듣는 음악은 하나였다. 최유리.

선생님은 잠깐 있어보라고 하시더니 한참 있다 돌아오셨다. 최유리의 이런 곡, 저런 곡을 들어보시고는 가장 쉬운 곡이라면 <숲>을 내미셨다. 좀 어렵긴 해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즈음 나는 녹음 횟수나 시간을 채우는 루틴에 실패하면서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칼퇴하는 날이라도 연습실을 써도 되냐'는 물음에 흔쾌히 좋다는 답을 받았다. 그 후로 정시에 퇴근한 날은 곧장 연습실에 간다. 주 2-3회 정도일지라도 한 번 가면 집중해서 연습할 수 있다. '해야 돼, 해야 돼'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연습실에서 <숲>의 첫 두 마디에 공을 들이는 동안, 새로 발견한 기쁨이 있다.


1. 일단 듣기, 듣고 또 듣기.

좋은 소리라면 질리지 않고

들을수록 새로운 곡일지니 두려워 말기.

그런 곡만이 연습할 가치가 있지.

끝까지, 숨소리도 듣기.



2. 공간이 루틴을 만든다. 연습실에 오면 된다. 나머진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3. 연습 사이의 휴식은 연습의 집중력을 높이고, 처음 연습을 시작할 때의 긴장감을 준다. 어느새 처진 몸통을 활짝 열어보기도 하고, 몰입한 표정이 예쁠 필요는 없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4. 악보를 잘 보고 원곡을 있는 그대로 듣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급하게, 많이, 힘준다고 느낌 있는 연주가 되는 건 아니다.



5. 나의 아티스트 아카이브

요즈음 좋아하는 가수들이 서로 닮아 있다는 걸 알았다. 아카이브가 생겼다.



6. 쉼표도 음악의 일부.

첫 <숲> 레슨 후 왜 쉼표를 지키지 않느냐는 지적을 받았다. 초반 두 마디의 빠름을 극복한 연주에 혼자 너무 취해있다가 쉼표도 음악이란 걸 놓쳤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졌다.



7. 보컬을 넘어서지 않는.

가끔 음량 조절이 안 된다. 너무 작거나 너무 크게 분다. 갑자기 보컬 레슨도 받고 싶다.



8. 가볍게 불기

두 번째 조언은 가볍게 불어보라는 것이었는데 그게 어떤 느낌인지 여전히 머리로만 이해한다. 다음 레슨에선 가볍게 불기. 힘듦과 지나침을 겪은 사람들이 듣는 위로의 선율이니까 내가 무거워지면 안 되겠지. 해보자.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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