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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말들(1)

by 뭉클



1. 빨라지고 싶은 날에도, 느리게(slowly, but slowly)


내 책상 모니터 아래에는 'Festina Lente' (천천히 서두르라)라는 말이 붙어있다. 속도감이 삶의 부제처럼 따라다녔다. 한국 사람 특유의 '시기나 때'에 대한 민감성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빨리 이르고자 하면 도달할 수 없다는'류의 사자성어가 유년시절 내내 가득했는데도 속도 조절은 늘 어려운 일.


러닝을 시작하고 나를 제일 괴롭히던 것도 기록이었다. 어느 정도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뛰는지, 5km 혹은 10km를 뛸 때도 얼마 만에 들어왔는지가 중요했다. 아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때 달리기 기록을 올린 피드에 (알고 보니 제자의 지인으로 밝혀진) 누군가 악플을 달았을 때 속이 쓰려왔던 건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슬로우 조깅Slow Jogging이란 말은 요즘 유행할 뿐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누군가는 '달리기 동호회'가 '러닝 크루 커뮤니티'로 바뀌는 동안 슴슴하게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피드에 올리지 않을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빠르게를 배울수록 느리게를 배우는 날도 늘어난다. 러닝은 '내게 빨라지고 싶은 날에도, 느리게'라고 말한다. 말없이 말을 건다. 느려지는 날도 괜찮아. 그냥 네 속도로.


빨랐다, 느려졌다, 그 연속선 상에서 유행도 없이 요행도 없이.



2. 전부가 아닌 일부가 되면 힘이 빠져

(not as a goal but as a tool for the goal)


타로를 학교 공간에 들이는 것,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업무 영역 안으로 들이는 건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애쓰고 힘쓰는 일에는 명분과 동의가 필요한 법. 지속하기 위해 용기와 열정만으로는 어렵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기도 했고.


타로 상담을 공부하면서 초반엔 '타로' 상담에 집중했다. 하지만 내 영역 안으로 그 새로운 걸 들이면서 외부와 미미한 마찰이 있었다. 내밀하게 들이지 못했던 것은 '타로'에 너무 방점을 찍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계기로 반 아이와 타로 '상담'이라는 걸 경험하고 나서 내 타로카드는 교무실 자리에 참고 도서와 함께 편안하고 안정감 있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속도 조절만큼이나 어려운 게 힘 조절.


어떤 취미도 전부가 아닌 일부, 내 삶을 구성하는 소중한 일부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힘은 저절로 빠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단으로써의 취미가 좀 더 견고하게 제자리를 지켰다.



3. 빈둥거리면 편안해져(a pause, sort of idling)


연습실에 간다. 일단, 간다. 하모니카를 몇 시간 연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아니, 연습을 꼭, 알차게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다. 그냥, 간다. 그 공간에 빈둥거리러 간다. 연습실에 가는 일 자체로 연습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다. 아주 최근에서야 경험한 일이다. 근 몇 년간은 (배우고 싶었던 크로매틱보다) 기본적인 트레몰로에 매진하고 있었고 중간중간 일을 하느라 하모니카 레슨과 연습 자체를 쉰 적도 많았다. 초기부터 꽤 열정적으로 임해온 편이었지만, 정작 크로매틱을 배우기 시작하고 일도 바빠지면서 연습이 짐처럼 느껴졌었다.


지금도 매일 연습하지는 못하지만 연습실에 가면 나는 연주할 곡을 틀어놓고 가만히 듣는다. 음악감상실에 온 손님처럼. 좋아하는 곡이 연습실을 꽉 채운 그 순간이 좋아지니 연습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빈둥거림 속에서 리듬을 되찾을 때 자연스럽게 활기가 생겼다.



4. 망쳐도 망하진 않아.(do it, live it, again)


그러다 연주를 시작하면 두어 번 완주를 했다. 틀려도 그냥 완주를 했다. 틀리는 순간엔 '망했다. 또 틀렸네.'라는 생각에 매몰되곤 했다. 하지만 빈둥거림 이후엔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 '망쳐도 망하진 않아. 이거 뭐 죽고 사는 일도 아니고. 또 하면 되지.'라는 쪽으로.



5. 나만의 페이스, 나만의 공간, 너의 목소리(my pace, my space and your voice)


러닝은 비우게 하고, 타로는 듣게 하고, 하모니카는 비우고 듣게 한다. 내가 나만의 페이스를 찾는 동안, 몸은 하나의 빈 공간이 되었다. 빈 공간이 된 몸은 러닝 하기에 참 좋은 공간이었다. 연습실을 찾듯이, 빈 몸을 찾았다. 그렇게 내밀하게 나를 가두어도 귀는 열려 있었다. 상담은 비우고 또 비운 후 그 안에 타인을 조심스럽게 들이는 일이었다. 멜로디와 박자로 연습실이 꽉 차있어도 내가 비어있어야 그 선율이 스며든다는 걸 알았다.


취미들이 내게 말을 건다. 그런데 어느새 돌아보니 서로서로 닮아 가고 있었다. 아이만 성장하는 게 아니라, 어른도 취미를 통해 성장한다. 그게 꼭 성숙과 같은 말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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