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집에 오면 냉장고 문부터 열어보는 것이 요즘 생긴 나의 버릇이다. 오늘도 냉장고의 반찬그릇은 제 뚜껑을 못 찾고 네모난 그릇에 동그란 뚜껑이 올려져 있거나 아예 뚜껑이 없는 채로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TV를 켜 둔 채로 주무시는 엄마에게 다가가, 작은 조명을 낮추고 TV를 끄는 것으로 ‘딸’의 업무가 시작된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떻게 잠을 자?
잔소리처럼 종알대며 반찬 그릇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했다. 여름이전의 엄마였다면, 뇌가 아프지 않은 엄마였다면 용납되지 못했을 풍경이다. 하지만 이제. 반찬 뚜껑이 네모난 모양이든, 둥근 모양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었다. 냉장고에서 음식들이 상하든지 말든지,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모자란 지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김치를 사 먹고, 국이나 찌개도 이미 완성된 가정간편식으로 바꾸었다. 엄마를 위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 온 에너지를 쏟은 하루 끝자락에 귀가해서 부모님의 찬거리를 챙기고, 빨래를 해서 널고 마른 옷을 개어 서랍장에 넣고 이것저것 챙기다 보면 밤 열 두시가 훌쩍 넘어 새벽녘. 그런 날 중 어느 날, 엄마에게 또는 나 자신에게 짜증을 내게 될까 봐 두려웠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내가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을 까봐 무서워서. 조금이라도 기운을 아껴 감사히 생각하자. 그래야 내 앞에 닥친 이 ‘준비되지 않은 장기전’을 잘 버텨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