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꿈꿀 때면 어릴 적 살던 집으로 간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유년의 그 집은 1920~60년대 사이에 지어진 근대풍 도시형 한옥으로 ‘ㅁ자형 구조’의 집이었다. 비가 내리면 처마 끝에 달린 회색의 함석 물받이에서 빗방울 소리가 듣기 좋았다. 무릎 높이의 마루로 올라가려면 거대한 격자무늬가 얌전하게 박혀있는 미닫이 유리문을 열어야 한다.
반대편의 마루 끝에는 회벽을 칠한 벽면에 아름다운 격자무늬가 박힌 미닫이창이 자지 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당시에는 꽤 비쌌던 전기 축음기, ‘전축’이 있었다. 진한 고동색 나무 장식장 형태의 전축은 그 자체가 신기하고 고풍스러운 물건이었다. 아빠는 한국의 가곡이 담긴 레코드판을 몇 장 사다 놓았고 아무도 없을 때면, 나는 조심스럽게 두툼한 LP판 하나를 골라 턴테이블에 올리고 떨리는 손으로 바늘을 얹었다. 음악이 나오기 직전 '치직-' 하며 정적을 깨뜨리는 전율과 함께 곧이어 깊고 웅장한 선율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네모난 마당은 마루에서 두 번을 내려가야 한다. 겨울을 지나 봄이 시작할 무렵이면, 대문 위에 심어둔 개나리가 골목을 향해 노란 폭포를 쏟아냈다. 개나리가 지기 시작하면 커다란 꽃밭 가운데에 무리를 지은 연분홍빛 진달래꽃이 봄빛을 분홍으로 물들였다.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나풀거리는 진달래꽃잎을 똑똑 따서 입에 물고 있으면 달큰한 꽃잎의 향이 목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장마가 시작될 즈음에는 붉은 사루비아가 톡톡 잎을 터드렸고 나는 꿀벌처럼 꽃잎의 단 꿀을 빨아먹었다. 뙤약볕에 수탉의 볏처럼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거드름을 피우는 맨드라미는 꽃밭의 여왕이었다. 붉은 벽돌의 담벼락을 가득 채운 담쟁이잎들은 여왕을 모시는 전사처럼 저녁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바람에 '촤르르' 소리를 내며 일렁였다. 해가 갈수록 맨드라미 여왕의 전사들은 늘어나서 꽃밭 주변의 담을 포위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선선해질 무렵에 피는 꽃, 내 얼굴만큼 크고 탐스럽게 피어나는 연보랏빛 달리아를 가장 좋아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