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등산 의병 이야기, 이제 우리가 합니다.

칼럼-중산문화원

by 소리빛


소나무와 대나무 숲이 울창한 어등산은 광산구를 상징하는 산이다. 어등산은 해발 338.7m의 부담 없는 트레킹 코스로 남녀노소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공통점은 ‘잉어가 용이 되어 승천(昇天)한 장소’라는 점이다.


어등산은 내륙과 영산강 사이를 이어주는 ‘호남의 문턱’ 역할을 한다. 군사적 요충지(要衝地)로서 견훤과 왕건의 전투가 있었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병영성을 쌓아 이 땅을 지켰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의병들이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1593년 7월 16일, 왜적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전라도를 공격했다. 충무공 이순신은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어제 한산도에 진을 옮겨서 치고 이로써 바닷길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습니다.”라고 하였다. 즉 왜군을 막기 위해 해로를 차단하여 육로의 연결 지역인 호남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또한 구한말에는 의병들의 격렬한 전투 장소였다. 어등산에는 수많은 의병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남아 있다. 산등성에 토굴을 파고 일제와 싸웠던 의병들은 1907년부터 1909년까지 1,313회나 전투를 벌였으며 호남의병 5백여 명이 전사하였다.


어등산에 가면, ‘의병길 가는 길’을 둘러볼 수 있다. 열악한 조건과 배고픔을 참으며 투쟁하던 의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길이다. 1908년 4월 25일 서봉리 마당바위 위쪽 석굴과 토굴에서는 김태원(김준) 의병장을 비롯한 23명의 의병들이 전사했다. 장정 23명이 비좁은 토굴에서 숨어 일제에 투항했던 절박했던 상황들이 그려진다. 1909년 1월 10일에는 운수동 절골 한당골에서는 조경환 의병장과 50여 명의 의병들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어등산 상봉래에는 ‘하지기 명당 고개’라는 곳이 있다. 의병들이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어깨와 손을 뒤로 묶인 채 끌려내려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어등산의 의병활동 자료는 후석 오준석 선생의 「의병전」, 송사 기우만 선생의 「호남의 의사열전」 등이 있을 뿐, 의병활동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미흡하고 문헌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 후손들은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지난 1월, 광산문화원이 중심이 되어 110년 만에 의병들을 위한 산제를 지냈다. 어등산은 지난 과거의 역사를 안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등산이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들을 미래의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역사인식은 시대적 상황과 환경의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를 바로 알고 객관적 상황으로 역사를 기록하여 다가올 미래사를 만들어야 하는 길목에 있다. 광산 시민들은 어등산의 문화유적과 역사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어등산의 잉어가 용솟음친 것처럼 광산의 밝은 미래를 기대해 본다.



sbscnbc 2018.3.19. 게재된 시사칼럼입니다.

http://sbscnbc.sbs.co.kr/read.jsp?pmArticleId=10000895587

(위 사진) 영국 기자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가 1907년 촬영한 의병 사진. TV 화면 캡처, 매일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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