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라는 물건은 살 때는 마냥 좋지만서도 막상 사고 나서는 이걸 도대체 어디에다 써야 좀 썼다는 기분이 들지 참 망설이게 만드는 물건 중 하나다. 물론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노트는 그것 자체로 여백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기왕 써먹으려고 산 물건이니 하다못해 쓰잘데없는 낙서라도 하는 편이 노트의 본래 쓸모에 훨씬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기에 나는 오늘도 백지 노트의 첫 장을 이렇게 아무 말이나 써 갈기며 채우는 중이다.
갖은 용도로 이런저런 노트들을 사 왔지만 지금까지 그 끝을 보고 만 노트는 수백 권의 노트 중에서 오직 학업에 치중하느라 어쩔 수 없이 산 노트들뿐이었다. 그러니까 끝까지 글자를 채운 노트는 학교 다니던 16년 동안 과목별로 꼬박꼬박 내용 정리하느라 급급했던 백 권도 안 되는 노트였다. 그럼 나머지 노트들의 상태는 어땠을까. 이미 재활용 처리장으로 넘어가 버린 것들을 상상한들 떡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굳이 자세히 떠올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래도 대충이나마 떠올려 보건대, 반을 겨우 채운 노트가 대략 3할이요 나머지는 아마도 처음 몇 장을 겨우 끄적여놓고 처량하게 잊혀버린 불쌍한 노트들일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방금 구입한 이 노트도 그런 수순을 밟게 될지도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결말을 맞은 노트들은 대다수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지 않은, 그야말로 그저 ‘쓰이기’ 위한 노트였다. 혹은 처음에는 목적이 있었으니 어느 순간 그 목적을 상실했거나 도중에 목적이 바뀐 것들이었다. 불행히도 이 노트마저 그렇게 뚜렷한 목적이 없다. 그저 ‘습작용’이라는 명시되지 않은 가제만이 붙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내 손을 거쳐간 그 수많은 노트들은 하나같이 나를 닮았다. 아니, 내가 주인이기에 노트는 내가 되었으며 그런 최후를 맞게 된 것이리라. 끝을 맺지 못하는 주인이기에 저들도 끝을 향해 내달릴 수 없었으리라. 그러니 방금 내 펜촉을 받아들인 이 노트만큼은 어떻게든 마지막 장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런 사소한 소망을 여기에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