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일기

글쓰기 책으로 기억 엮기 1

by 세필

이 매거진의 첫 삽을 뜬 지가 한참이나 지났는데 책 이야기는 안 하고 무슨 헛소리냐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먼저 내 글쓰기 생활의 원류가 어디쯤에 있는지부터 짚어 놓아야 내 방 한켠에 쌓여 있는 십수 권의 글쓰기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좀 편할 것 같다.


사실 근본에 관한 질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디디고 있는 이 세상부터가 무에서 탄생한 것이므로, 쓸모없는 질문에서 가장 유의미한 답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뭐 어떤가.




대학 진학 전까지만 해도 글이라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길을 걷고 있었다(누구든 그러지 않을까). 아주 어릴 적부터 과학을 좋아하던 아이에게 글이란 국어 시간에 밑줄 쳐 가면서 읽어야 하는 귀찮은 것이었으며, 일정 분량을 억지로 욱여 적어야만 하는 재미라고는 단 1도 없는 과제일 뿐이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에 들었던 글쓰기 강의는 그저 졸업에 필요한 교양 필수 과목 3학점의 가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한 학기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쓰라고 해서 썼던 단 한 편의 과제로 나는 대학 4년 동안 딱 세 번밖에 받지 못한 A+ 학점 하나를 손에 넣었다. 어쩌면 내게도 조금이나마 글 쓰는 재주가 있다는 것이 그때 밝혀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걸 깨닫기까지는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8959665665_1.jpg 글 쓰는 삶의 서막(?)을 알린 책. 그러나 기말고사가 끝난 후 누구도 이 책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글쓰기라고 할 만한 일은 2학년 2학기 등록금을 내고 나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지금은 쓰지 않는 일기장 애플리케이션의 맨 첫 기록이 2012년이고, 그때는 동기들이 모두 군입대를 하고 혼자서 쓸쓸하게 강의를 듣고 다니던 때였다. 그저 그날그날의 감정을 짧게 토해내는 일기를 쓰며 마음을 달래던 시절.


대2병에 걸린 그때의 기록. 어쩌면 글쓰기라는 것의 본질은 이렇게 날것의 말들을 털어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짧은 글에서 나의 글쓰기는 태어났다.

열 줄을 겨우 넘긴 짧은 일기는 훈련소에서 편지지 한 장 정도는 가뿐히 넘기는 양의 일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를 겨우겨우 버티며 새긴 일기는 습관으로 남아 지금도 이따금씩 하루의 감상을 적어 나만의 창고에 고이 접어놓는다.


IMG_6912.JPG 온갖 울분이 담긴 훈련병 시절의 일기.


일기를 그렇게 열심히 쓰다 보니 딴에는 좀더 거창한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아마도 군생활의 무료함을 책으로 달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의식의 확장이라는 게 일어난 모양이었다. 읽은 책의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서 책의 구절구절을 베껴 썼고, 그러면서 나도 언젠가는 책을 내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래서 <문장강화>를 읽었고, <소설 쓰기의 모든 것>을 세트로 구매했다. 무슨 글이든 쓰려면 먼저 생각이 깊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철학과 관련된 책들을 수십 권 주문했다(강신주 씨의 책을 많이 사서 읽었다. 그 이야기는 언젠가 할지도 모르겠다).




횡설수설 이야기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다. 지금의 내 글쓰기는 날것의 감정이 담긴 7년 전의 일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때의 좋고 나쁜 버릇들은 지금까지도 어떻게든 살아 있어서, 나는 지금도 이렇게 일기 같은 산문을 쓴다. 아니, 산문을 빙자한 일기를 쓴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나마 글을 쓸 수 있다는, 글쓰기의 싹수가 나에게도 있다는 걸 알려준 것은, 신입생 시절 영문도 모르고 머리를 싸매며 빈칸 채우기에 급급했던 글쓰기 강의 교재였다. 그래서 나는 늦게나마 작가를 꿈꾸게 되었고, 글쓰기 모임에도 참여해서 괜찮은(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느낀다) 글을 선보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첫 단락조차 쓰지 못한 소설을 어떻게 끝마쳐야 할지를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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