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풀이
나는 언제나 죄책감을 안고 산다. 어쩌면 죄책감이야말로 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부모님의 신용카드를 긁을 때, 그 신용카드로 인터넷 서점에서 5만 원 상당의 책을 밥 먹듯이 지를 때, 부모님의 지원으로 하라는 공부는 않고 한량처럼 나돌 때, 그냥 되는 대로 누워만 있을 때, 몸이 아파 병원에 갈 때도. 일상의 모든 일들이 내게 죄책감을 안긴다. 쓸데없고 불필요한 감정이지만, 원래 별것 아닌 게 더 큰 법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탓’을 한다. 남 탓을 해봐야 서로 감정만 상하니 그냥 모두 내 탓으로 돌린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먹고 놀고 있는 것은 당연히 내 탓이오, 시험을 망치면 내 탓 불합격한 것도 내 탓 우유부단한 것도 내 탓 부모님이 힘든 것도 내가 못난 탓이다. 남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는 건 힘들고 복잡하니까 차라리 나를 상처 입힌다. 내 마음의 상처는 신경이 없어서 아프지 않으니까 모른 척 넘어갈 수 있으니. 니체라면 아마도 내 뒤통수를 때리며 시원하게 욕을 했을지도.
눈치를 보고, 화낼 만한 일을 피하고, 숨어 살고, 고개 숙이며 살고, 눈을 깔며 산다. 그렇게 배웠다. 그렇게 보고 들으며 사는 법을 익혔다. 모든 것은 쓴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발버둥. 무엇 하나 흘려 넘기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무시하려 해도 분명 어딘가 한켠에 꼭 뭉쳐 있다. 혼나면서 배웠다. 배워야 했다. 그래야 다음엔 덜 혼나니까. 감정을 죽였다. 내 논리가 허접해서 사람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시험 전날 부모님이 저녁이나 먹이러 오신다는 것도 부담스러워 고사하다 매번 불효짓을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힘들다. 그동안 세월아 네월아 한 것이 찔려서 그럴까. 차라리 과외 뛸 적엔 그런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번 돈을 내가 썼으니까. 그래서 더 비참하다. 8개월 동안 용돈만 축내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애초부터 나쁜 놈이었다면 뻔뻔하기라도 했을 텐데.
글에 감정이 실리다 보니 두서가 없다. 내 글에는 항상 두서가 없었다. 도대체 글을 쓰겠다는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어쩌겠나, 내 인생이 두서가 없는 것을. 참 맞는 말이다. 글은 정말로 쓰는 사람을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