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책을 꺼내보며

조용히 잠들어 있던 책 들어 깨우기

by 세필

초등학교 때는 학습 만화를 밤을 새우며 읽었고, 중고등학생 시절엔 수행평가용 권장도서를 수능 공부 대신 읽었다. 물론 만화나 권장도서만 읽은 것은 아니다. 그 와중에 국어 교사인 작은아버지 댁 책꽂이에 꽂힌, 훗날 국어 문제 지문에서나 볼 법한, 그때는 누군지도 몰랐던 사람이 쓴 이상한 책들을 순전히 흥미 본위로 탐독하기도 했다(그 책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정인지의 <용비어천가>였다). 물론 그 외에 읽은 책들은 대부분이 '읽어야만' 했던 것이거나 '읽어야 할 듯한' 것이었다. 그 시절의 책은 그저 읽기 위한 물건이었다.


본격적으로 읽지도 않을 책을 마구 사들인 때는 군 복무 시절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던 의무소방으로 복무했고, 소방서의 잡무를 모두 처리하고 남는 시간을 어떻게든 때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취미를 붙여야 했다. 나는 하필이면 책을 읽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취향에 맞는 일본 소설 두 권을 읽는 것으로 시작했다. 일병 월급 8만 원을 모두 책을 사는 데 탕진했다. 그 뒤로도 달마다 들어오는 월급은 줄줄이 책이 되어 쌓여만 갔다. 말년에는 월급만으로도 모자라 미리 외워둔 부모님의 신용카드 정보로 책값을 결제했다. 전역 이틀 전날에는 지금까지 산 책들을 옮길 방도를 찾는 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게 군 복무 시절에 만들어진 책 사재기 습관은 전역하고 나서도 3년 동안 주욱 이어지다 지금은 자제하는 중이다. 그 3년 동안 내 인터넷 서점 계정의 회원 등급은 언제나 맨 꼭대기층이었다. 5년 차 초보 장서가의 몇 안 되는 소소한 자랑거리라고 하겠다.



책을 사들이는 일은 굉장히 즐거운(무엇이든 돈을 쓰는 건 즐겁다) 일이지만, 책상 위나 방바닥에 그 책들이 점점 쌓여서 내 활동 공간에 제약을 걸 때 1차로 골치가 아프고, 그렇게 켜켜이 쌓인 책들의 8할은 아직 손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2차로 골치가 아프다. 그렇기 때문에 책에 묻혀 죽지 않으려면 천장 높은 줄 모르고 쌓여 가는 책들의 탑을 무너뜨리고 그 책들을 어떻게든 처분을 해야 하는데, 손때가 묻지도 않은 책을 처분하기란 곱게 키운 자식 쫓아내는 것 같아서 내키지가 않는다.

책상에 쌓인 책들. 다행히도 이 책들은 몇 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손때가 탄 아이들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책을 책상 위나 방바닥에 방치하는 것이 책을 위한 일은 아닐 것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지금까지 미루고 미루어 왔던, '묵은 책 처분 작전'을 실행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작전을 실행하기에 앞서, 일단 어떤 책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창고 한켠에 빼곡히 쌓여 있는 책들 중에는 분명 읽은 것도 있고 5년 동안 읽지도 못한 것들이 섞여 있으리라. 그래서 방 정리도 할 겸 대략 세 시간에 걸쳐 고된 조사 분류 작업을 시행했다. 먼저 종이에 책 제목을 나열하고, 읽었는지 여부에 따라 나름대로 표시를 했다. 한 번 읽은 적 있는 책 제목 앞에는 1, 한 번도 읽지 않은 책에는 N, 굳이 또 읽고 싶지 않은 책에는 X.

5년 동안 묵은 책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실망.

이렇게 분류한 책들은 이번에는 쌓아놓을 구역을 정해서 재차 분류에 들어갔다. 중고로 팔 것과 읽을 것, 그리고 팔리지도 않을 것으로. 이 분류는 알라딘 중고 매입가 검색 시스템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그런데 막상 분류해 놓고 다시 쌓인 책들을 보니, 아무래도 이것들을 그냥 처분하기보다는 그래도 나름 오래 방치된 책들의 속사정이라도 한번 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저것들을 보내기 전에, 적어도 저 책을 언제 왜 샀는지, 그때 내 심경은 어땠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도 여기 짤막하게 남기려고 이 포스트를 쓴다.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건너간
'책' 그 자체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책 사들이기의 시발점이 된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의 캐치프라이즈다.

그렇다. 어떤 책이든, 사람의 손을 거쳐갔다는 것만으로 책은 거쳐간 사람의 이야기를 품는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을, 내 방바닥 위에 쌓인 작은 책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