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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후의 감

동네 책방의 역할

기억의 목소리를 전하는 일

by 소남우

책방은 단순히 책을 파는 서점과 다르게 동네의 이야기를 담고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도 '밤수지맨드라미 책방'은 딱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다.


무심코 힐링 하나만 바라보고 온 이들에게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아시나요, 라고 묻는 곳.

모른다면 여기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라고 속삭이는 곳.


23.jpg 우도 '밤수지맨드라미 책방'


밤수지 책방에는 제주 역사와 해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코너가 따로 있다.

'사물에 스민'이라는 부제에 『기억의 목소리』를 펼쳤다가

눈물 떨어질 것 같을 때 덮고, 쏙 들어가면 다시 펼쳐 읽기를 반복했다.

구매하지도 않은 책에 눈물을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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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목소리』는 제주 4·3사건 유족들이 간직한 유품과 그 유품이 간직한 목소리를 엮은 책이다.

경찰의 말발굽에 치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어른들이 하나 되어 비폭력으로 항의한 사건은

무차별 발포로, 총파업으로, 공산주의자 색출로, 토벌 작전으로 이어졌다.


토벌대는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끌고 갔으며, 은신처를 말하면 살려주겠다 땔감 구하러 갈 청년들은 앞으로 나와라 등 거짓말을 이용해 한 명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방책을 세웠다.


엄마의 치마폭에 숨어 총알을 피할 수 있었던 아이,

바다에 던져진 부모를 상상하며 생선을 입에도 대지 않는 아이, 강제 징용의 아픔을 말 대신 그림으로 그려내는 아버지를 보고 말 없이 눈물만 흘리며 조용히 종이를 덧대어준 아이,


열다섯 이상은 나오라는 경찰의 말에 아버지가 열일곱이던 자신의 나이를 속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아이,감금된 가족을 구하고자 급하게 거액을 빌려 찾아갔더니 일주일 전에 벌써 죽였는데 우리도 서북청년회가 시켜서 한 일이니 불쌍하게 봐달라는 말을 들은 사람의 이야기.


시간이 흘러 그들이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을지라도 가족과 이웃의 죽음을 목도한 기억은 그 자체로 비애의 멍울로 남아있을 것이다. 전에 어느 책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표현은 그 상처가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것이라고 박제하는 것이기에 씻을 수 있다고 부르자는 글을 본 적 있다. 그러나 때로는 어떠한 보상과 사과에도 아물지 못하는 상처가 있는 것 같다.


제주에는 예로부터 삼무(三無) 정신이 있다고 한다. 제주 사람들은 근검절약하고 자립심이 강해 거지가 없고,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순박하기에 도둑이 없으며, 서로 신뢰감이 높고 협동심이 강하기에 대문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 한 명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어른들 모두가 나선 것일지도 모른다. 대문을 걸어잠그지 않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상상가능한 모든 일이 잔존하는 공통된 역사적 아픔을 넘어서진 못할 것이다.


『기억의 목소리』를 읽고 외지인을 향한 제주도민들의 불친절함이나 텃새에 관해 들은 말들이 생각났다.

내가 제주 토박이라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게 살고자하는 꿈 하나 안고 이곳에 자리잡는 외지인을 마냥 환대해주기엔 어려울 것 같다. 그들로 이해 이런 역사가 묻히거나 가려진다면 더욱.


슬픔이 있었던 곳에 으레 슬픔만 있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지만, 슬픔을 다른 색으로 물들이거나 상쇄하는 것이 아닌 회피, 외면, 무관심은 다른 일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네 서점은 걸음한 이들에게 여행의 또 다른 목적을 제공해야 한다.


제주 4·3사건은 볼과 백 년도 되지 않은 근과거의 역사이다.

지난 며칠 간 제주를 거닐며 스쳐간 어르신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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