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물건3] 만년필

뒤로가기는 없어요 NO ERASER

by 파인피네

일기를 쓸 때나 생각을 메모할 때 아주 가끔 만년필을 꺼내 쓴다. 주로 망설여질 때, 고민이 많을 때 그렇게 한다. 내 만년필은 몇년 전 아빠가 여행을 갔다가 괴테 박물관에서 선물로 사오신 것인데 날카로운 펜촉에 잉크를 찍어서 쓰는 투박한 펜이다.


만년필의 잉크는 생각보다 빨리 메마른다. 잉크를 찍고 몇 초 고민을 하다보면 몇 글자 써내려가지 않았을 때 또 다시 잉크를 찍어야 한다. 그래서 잉크를 찍었을 때 빨리 무언가를 써야한다는 약간의 조바심이 들곤 하는데 그 느낌이 나쁘지 않다. 잉크가 휘발되기 전에 재빨리 무언가를 써내려가야 한다는 약간의 압박은 꾸며지지 않은 날 생각을 글로 옮기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만년필에는 뒤로 가기가 없다. 지우개도 쓰지 않고, 수정액도 쓰지 않는다. 약간의 잉크를 머금은 날카로운 펜촉이 종잇장을 스치고 나면 기록은 그걸로 끝이다. 지우개나 수정액을 잘 쓰지 않게 된다는 특징은 내가 생각하는 만년필의 장점 중 하나이다. 살면서 어떠한 선택을 할 때, 혹은 생각을 정리 할 때 '수정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고민을 늘릴 때가 많다. 글을 쓸 때 더 나은 표현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듯 삶의 매 순간에서도 더 나은 길이 있지 않을까, 더 좋게 고쳐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과 망설임이 남는다. 지나간 순간에 대해 계속 뒤를 돌아보고 가끔은 질척대게 된다. 뭔가 내가 더 할 일이 남았다고 느낄 때의 어떠한 선택의 끝맛은 개운치가 못한 법이다.


그래서 가끔은 지우개도, 수정액도 없는 '만년필스러운' 사고방식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한 번 펜촉이 스치고 나면 그걸로 순간의 펜촉의 여정은 끝이듯 가끔은 내가 만든 선택이 최선이리라 믿는 것이다. 물론 고쳐쓰기는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 중 하나라고 한다. 생활에 있어서도 실수를 찾고 수정해나가는 건 가장 기본적인 성장의 방식이다. 그러나 과감해질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매순간의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고, 마주치는 모든 기로에서 과거의 내가 선택한 여정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만년필로 글자를 빠르게 써내려가는 순간에 과거의 나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용기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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