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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Nov 24. 2021

이별을 고하는 계절

낙엽이 다 떨어지고 나면 이별과 새로운 출발이 기다린다.

20211124

부리나케 약속 장소로 달려 나가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그냥 뛰어갈까 한 발자국을 더 떼었지만 비가 얼마나 더 올지 모르고, 이 추위에 비를 맞았다간 감기에 걸릴 것 같아 다시 집으로 갔다. 약속 시간에 늦을 까 봐 어쩔 수 없이 차키를 챙겨서 나온다. 



간혹 눈이 흩날리기도 하고 보슬비가 내리기도 하는 날씨다. 앞 쪽에는 털이 보송보송 붙어있지만 뒤축은 뻥 뚫려있는 털 슬리퍼를 신게 되는 날씨다. 비가 내려도, 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다.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 가을의 끝, 겨울의 초머리다. 이별을 고하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다. 언젠가 벌써 올해가 30일밖에 남지 않아서 너무 아쉬워요, 하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눈웃음이 너무 예뻤던 그녀가 "아직 30일이나 남았잖아." 하며 집으로 핸드크림과 함께 손편지를 보내주었다. 벌써 다가온 연말을 보내며 고마웠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운 얼굴과 더 친해지고 싶은 얼굴을 그려본다.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사람들이 예전 그대로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초승달

                 -김경미-


얇고 긴 입술 하나로

온 밤하늘 다 물고 가는

검은 물고기 한 마리


외뿔 하나에 온 몸 다 끌려가는 검은코뿔소 한 마리


가다가 잠시 멈춰선 검정고양이

입에 물린

생선처럼 파닥이는

옥색 나뭇잎 한 장


검정 그물코마다 귀 잡힌 별빛들


나도 당신이라는 깜깜한 세계를

그렇게 다 물어 가고 싶다



아침부터 창밖이 소란스럽다. 사다리차가 기다란 팔을 뻗어 짐을 내린다. 위에서 아래로 짐이 실려간다. 덜커덩 거리며 짐이 잠깐씩 허공에 머물다 내려간다. 사다리차 옆에서 누군가 담배를 입에 물고 무어라 소리친다. 밑에서부터 1, 2, 3, 4...... 작은 소리로 세어본다. 15층이 이사 간다. 내가 아는 집이 아니라는 사실에 순간 안도감이 생긴다. 연말에는 이사도 더 많고 전학도 많다. 인사이동도 잦고 낙엽조차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나 또한 많은 변화가 생길 예정이다.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소리 없이 이별을 고하고 아픔 없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별을 고할 때면 '나'라는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작은 존재가 가장 큰 부피감으로 느껴진다.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사람이 온다는 게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일진대, 사람이 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분주하고 부산스러운 연말에 누군가의 공석을 느끼고 그 부재로 인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잘못된 선택일까? 당연한 과정일까? 그 자리를 잘 채우고 있었다는 반증일까?



"사물은 상처받지 않는다. 피를 흘리거나 고통을 당하거나 죽지도 않는다. 그리고 사물과 상품, 물건을 제일 중요하게 취급하는 문화는 결국 상처받기 쉬운 인간으로부터 도피한 문화일 뿐이다. 내면성을 피하거나 친밀함을 거부하거나 사람들의 가치를 부당하게 폄하할 때, 우리는 무방비의 인간 실존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_존 캐버너, <소비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 



존 캐버너의 말을 뒤집어 보자면 상처 받는 '인간'은 피를 흘리고 고통당하고 죽는다. 쉽게 상처 받는다. 무방비의 실존 속에 있다. 사람답게 살고자 한다면 그 고통과 치욕을 감내해야 한다. 사람의 감정을 이론화할 수 있는 것일까? 괴로운 감정은 얼마나 깊이 들여다봐야 하는 것일까? 이별을 앞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충분히 아파해야 할 것 같다. 그 당혹스러움을 함께 견뎌야 할 것 같다.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단단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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