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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Nov 23. 2021

글을 쓰는 일, 두려움을 뛰어넘는 일

글을 쓴다는 건 두려움이라는 안개를 온몸으로 뚫고 지나가는 일이다.

21.11.23


글을 쓸 때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어려움은 두려움이라는 안개다. 실체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 이 안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 같은 무기력함 혹은 절망감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고 몇몇에 알렸다. 그동안  글은 혼자만 알고 있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성격이라 이를 알리는 것조차  결심이 필요했다. 브런치를 시작하는 것도, 브런치를 한다고 알리는 것도 용기를 필요로 했다. 사람들에게 알리고 나니 하루  편의 글을 올리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나의 사소한 생각들이 너무 유치해 보이진 않을까?  소재를 글로 나타내도 괜찮을까? 당사자가 따로 있는 글감일 경우 본인이 알아도 괜찮을 걸까? 그중에서 가장  두려움나를 드러내야 한다는 수치심이다. 나라는 보잘것없는 인간을, 누추한 사상의 영토를 종이 위에 지르밟아 놓는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운전을 하다 보면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마치 나의 미래에서 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저 차의 운전자는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의 미래를 알고 있다. 굽이치는 저 모퉁이 끝에 어떤 길이 펼쳐지는지, 차가 막히는지 한 대도 없는지, 비포장도로이거나 공사 중인 도로인지, 혹시라도 사고가 났는지 안 났는지 조차 알고 있다. 나도 맞은편 차의 미래일 수 있을까? 왠지 나는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오고 있는 것만 같다. 지나왔지만 알 수 없어요, 보았지만 깨닫진 못했어요, 내가 지나올 땐 이랬지만 지금은 또 아닐지도 모르죠. 무언의 교류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글을 쓰는 행위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사람들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하지만 같은 미래가 펼쳐질지는 알 수 없다. 같은 사건에 다른 느낌을 받고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내가 어렵게 지나온 좁은 에움길이 누군가에겐 이미 공사를 다 마친 쭉 뻗은 한길일지도 모른다. 공감은 좋지만 조언은 어려운 이유다. 글을 쓰지만 언제나 틀릴 수 있고 바뀔 수 있다는 전제로 쓴다.


글을 쓸 때 어쩔 수 없이 내가 드러난다. 솔직하게, 진솔하게 적어 내려 간 글은 잘 빚은, 오래된 술과 같은 향이 난다. 술을 잘 모르는 사람도 그 깊은 맛과 향에 매료된다.



"안에는 안 들어갔다?"

"예, 그냥 한 바퀴 둘러봤어요." 팀은 프랭크의 눈을 똑바로 보며 미소를 지으면서도 이마를 찌푸렸다. 왜 저리들 야단이지? 자기들이 그 집주인이라도 되는 거야? 주인이라도 그렇지.

"현관문까지 가긴 했는데.... 문을 열진 않았어요. 문손잡이도 없더라구요. 문이 잠겨 있나요?" 팀은 언제 들어왔는지 술잔을 들고 서 있는 샘 이디를 발견했다.

"그 집은 잠겨 있지 않아." 프랭크가 침착하게 말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검은 집> 중에서


검은 집은 술집에서 회자되는 안주거리 장소다. 그곳에서 십 대 소년이 살해된 채 발견됐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곳에 갔다 온 모험담을 늘어놓는다. 정작 갔다 오지 않았지만 잠겨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티모시가 가보니 그 집은 잠겨 있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다. 글을 쓸 때 마주하는 두려움은 이 검은 집과 같은 존재인 것 같다. 쓰고 나면 정작 아무것도 아닌데 쓰기 전에는 호들갑 떨게 되는 미지의 세계. 안갯속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른 채 안보이니까 그저 두려워만 하는 것.


소설가 김연수는 이 '검은 집'이 소설가의 재능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검은 집이라는 게 소설가의 재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술집에 모여서 농담거리로 삼을 뿐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들여다볼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 집과 같은 것. 소설가가 재능에 대해서 말할 때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을 때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p.23 중에서



부끄럽지만 나도 이 질문을 자주 했었다. 글을 쓰기도 전에, 혹은 이제 막 완성한 단편 소설을 들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바빴다. "제가 재능이 있어 보이나요? 계속 글을 써도 될까요?" 이제야 그 질문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이었는지 알겠다. 재능은 원래 없는 것이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그저 쓰는 것, 방법론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질문을 계속 던지며 계속 사유하고 곱씹고 더듬거리며 답 없는 질문을 계속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은유 작가는 <글쓰기의 최전선>이라는 책에서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을 즐기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글을 쓰고 싶으면 쓰면 되는데 핑계만 늘어놓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헨리 밀러가 자신의 첫 소설인 『북회귀선』을 쓰면서  창안한 11 계명 중 마지막 계명이 압권이다.

"언제나 제일 먼저 할 일은 글을 쓰는 일.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는 등, 다른 모든 일들은 그다음에."

이 문구를 가슴에 새기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는 제외하고, 최대한 하루에 한 편의 글을 계속 쓰려고 한다. 공개할 수 있는 글도 하지 못하는 글도 있지만 이는 이대로, 저는 저대로 좋다.



오늘도 두려움이라는 안갯속에서 글을 쓴다. 안갯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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