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이 아니라 구멍을 통해 문이 열린다.
연말이 지나니 자몽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추위에 어깨는 움츠러들고 걷기엔 길이 미끄럽다. 눈송이가 미끄럼틀로 미끄러지듯 하룻밤 사이에 나이 한 살이 늘어 버렸다. 외투 속에 감춰둔 몸은 건강검진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고 밥을 먹을 땐 영양성분이 신경 쓰인다. 먹고 싶어도 참아야 할 음식이 늘어나고, 자주 짓는 표정에 따라 주름살이 늘어난다. 이게 바로 지구별에서 보낸 연식을 나타내는 표징인가 보다. 아직 ‘나이를 먹었다’고 표현하기엔 섣부를지라도 각자가 체감하는 작년과 다른 내 모습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다. 마음은 이팔청춘인데 신체는 따라주지 않는 것, 이를 알아가는 게 노화 아닐까?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노인들의 대화가 떠오른다. 자리에 앉아서도 지팡이에 몸을 기댄 할아버지가 등산복을 입고 앉아 있던 옆자리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내가 네 나이만 됐어도 못할 게 없어. 십 년만 젊었어도 날아다녔지” 그 말을 듣는 등산복 할아버지는 얼핏 칠순에 가까워 보였는데 말이다. 나이도, 노화도 어쩌면 상대적인 개념일지 모른다. 연기처럼 쉽게 사라지는 마음에 의지해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갈고닦을수록 단단해지는 육체를 돌보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새해가 되고 짊어진 숫자가 늘어나면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어깨를 펼쳐 몸을 더 움직여야 한다.
작년 마지막 달력을 넘기기 전에 지인들과 도르리를 했다. 각자 자기 몫의 음식을 준비해와서 다 함께 나눠 먹는 파티다. 한 가지의 음식만 가져가도 여러 음식을 즐길 수 있다. 나는 순대볶음과 견과류를 넣은 주먹밥을 해갔다. 다른 사람들이 준비해온 수육, 토마토 마리네이드, 떡볶이, 팥죽, 렌틸콩 샐러드, 감자 그라탱, 케일 스프링롤 등과 어우러져 이 정도면 두 살을 더 먹어도 아쉽지 않을 기쁨이 넘쳤다. 음식을 먹은 후에는 화이트 엘리펀트 게임을 즐겼다. 마찬가지로 각자 가져온 선물을 한 군데에 모아 놓고, 순서대로 선물을 가져가는 놀이다. 뒤의 순서일수록 좋은데, 앞서 나온 선물을 빼앗아 가져갈 수 있다. 서른 명 가까이 모인 곳에서 나는 두 번째 순서였으니, 선물을 두 번이나 뺏겼다. 뺏긴 사람도 빼앗긴 사람도 웃고 넘길 수 있는 재밌는 시간이었다. 어른에게도 놀이가 필요하다.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다 함께 모여 웃고 즐기다 보면 나이도 잊은 채 흥겨운 마음이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모임 장소를 내어주신 집에 넓은 창고가 있어 아이들은 공놀이를 하고 색종이를 접었다. 어른들은 한 방에 모여 근황을 이야기했다. 30대부터 50대까지 모여 자녀 교육, 사업, 직장 생활, 부부 문제 등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했다. 안부를 묻고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며 가끔 만나도 매일 보는 것 같은 연대감이 생겼다. 여러 사람 앞에서 진솔한 삶을 내어 보이고, 타인의 삶에 질문을 던지면 내가 가진 문제는 먼지처럼 작아져 버린다. 상황은 변하지 않아도 마음이 갑옷을 입고 견디고 헤쳐 나갈 힘이 돋는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해 묻는다. 연말 모임에서도 본인도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삶이 고달파서, 자기주장을 펼치고 싶어서, 기획서를 잘 쓰고 싶어서 글을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상담해 온다. 누군가 내 글을 볼 게 두려워서, 시간이 없어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몰라서, 의중은 있지만 어렵다고 토로한다. 글은 엉덩이로 쓴다. 무조건 자리에 앉아야 글을 쓸 수 있다. 앉아 있는 바로 그곳에서 글쓰기가 시작된다. 노트에 연필로 쓰든, 휴대폰 연습장이든, 노트북이나 어플이나 블로그든 쓰면 된다. 무슨 글을 써야 할까?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 일상을 어지럽히는 고민, 화나게 하는 인물, 해보고 싶은 일, 오늘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과 무엇이든 좋다. 『치유하는 글쓰기』의 저자 박미라는 글이 가진 치유의 힘에 주목하며 “때로는 낙서가 당신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쓴 은유는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글쓰기는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이다. 영화감독 줄리아 캐머런은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책에서 ‘모닝 페이지’를 강조하는데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것이나 자유롭게 쓰라고 권유한다. 이를 통해 솔직한 내면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가장 쓰기 싫은 내용이 무엇인가 생각한다. 절대 쓸 수 없는 일, 다시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떠올린다. 내면의 저항을 많이 받을수록 진짜 내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얼마나 투명하게 드러내느냐에 따라서 더 많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진심이 전해질 때 타인의 마음도 열리고 친밀도가 증가한다. 바로 그 일이 최고의 글감이다. 글쓰기를 통해 사건의 정확한 본질을 확인하고 덜 상처받을 수 있다. 얽매이면 약점이지만, 열어 보이면 지나간 흉터가 된다. 흉터는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고 억압할 수도 없으며 더 커지지도 않는다. 게다가 내가 보인 흉터는 이미 타인이 가지고 있는 상흔과 비슷해서 이미 흔한 ‘점’과 같은 증상일지 모른다. 빈 마음에 빈자리가 생긴다. 빈자리에는 누군가 와서 앉을 수 있다. 완벽이 아니라 구멍을 통해 문이 열린다.
구차한 내면을 구질구질하게 옮겨 적길 바란다. 시간에 쫓겨 살수록, 등에 진 짐이 무거울수록, 특별해 보이지 않고 볼품없어 보일수록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나를 위한 위로이자 당신을 향한 러브레터다.
2023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