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방학에 글을 쓴다는 건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절박함이다.
2021.12.30
쓸수록 어려운 건 글이요, 할수록 어려운 건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원에서 소설을 전공했지만 여전히 소설을 쓰는 건 어렵고, 요즘 에세이 쓰기를 배우고 있지만 배울수록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괴감이 든다. 특별한 소재일 때는 너무 특이한 건 같아서, 평범한 소재일 때는 너무 흔한 것 같아서 망설여지는 게 에세이다. 사람마다 다른 말투가 있듯이 저마다 다양한 문체를 가지는 데 내가 사용하는 문체는 무엇인가 고민에 빠진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학교에 다닐 때는 선생님이 인정을 해주신다. 말을 잘 듣거나 공부를 잘할 때 인정을 받는다. 두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쓰는 지금은 특별한 인정이랄 게 없다. 하루하루가 무탈한 것에 감사할 뿐이다. 아이들은 매일 물을 엎지르고 과자 가루를 휘날리고 수많은 뒤치다꺼리를 생산해낸다. 초롱이는 눈망울과 고운 목소리로 그 대가를 지불하듯 나를 안아준다.
목적지향적으로 혹은 성과에 대한 보답 주의로 살아온 사람에게 목표도 성과도 보답도 없는 지금의 삶은 내가 지금 지도의 어느 부분에 서 있는지 헤매게 한다. 아이들은 나의 대리 성취자도 아니고 또 다른 자아실현의 통로도 아니다. 특별한 존재로 나와 지구 옷을 입고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 특별한 인연이다. 보호하고 사랑하고 돕는 자의 역할이다. 아이들이 나의 전부일까? 아이들이 나의 꿈일까? 비교적 어린 엄마인 나에게 그것은 너무도 어려운 질문이다.
만나는 사람과 장소, 때에 따라서 변화하는 나를 본다. 특히 아이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내 모습은 많이 다르다. 아이들이 있을 때는 아무래도 아이들을 챙겨야 하니 '나'로 존재하기는 어렵다. 줄곧 아이들과 있다가 아이들이 없을 때의 내 모습은 나 조차도 생소하다. 스스로가 어색하다.
이에 대해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네!"
인간은 수많은 디테일이 모여 하나의 성격을 형성한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누구도 개인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스스로 조차도 말이다.
글을 쓰려면 책을 읽어야 하고 생각이란 걸 해야 한다. 사유하고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묻고 깨지고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삶이란 당장의 뒤치다꺼리에 치여서 생각은커녕 허리 한번 펴기도 어렵다. 일주일에 한 권의 책을 읽고 매일 글을 끄적여 보는 게 매우 사치스럽게 다가온다. 아이 엄마가 누구의 도움 없이 글을 쓴다는 건 헛된 망상일까? 찬란해 보이는 과거에 대한 집착일까? 왜 쓰는지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도 모르면서 끊임없이 나와 싸운다.
"마음 한번 먹었으면 밀고 나가라. 후회도 주저도 말고.
고삐는 젊음에게 주어라. 다시 오지 않을 젊음에게.
네가 너를 잃지 않는 순간은 네가 이기는 순간!"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책을 읽는 만큼 삶을 살아내야 앎이 삶이 된다면, 일단은 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일주일에 한 편의 글을 올리기로 했으니 망설이고 후회하고 고민하는 만큼의 흔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