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을 보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의 한 걸음을 내딛는다.
너무 멀리 내다보면 당장 한 발을 내딛기가 힘들어진다. 글을 쓰기 전 이 글을 통해 무언가 이루거나 도달하려고 하면 글자 하나를 감당하기도 어렵다. 욕심과 두려움에 갇혀 숨이 턱턱 막힌다. 한때는 등단을 위한 글을 썼다. 각종 문예지와 신문사에서 입상한 작품들을 분석하고 경향을 파악했다. 내 글이 갖추지 못한 필수 요소가 무엇인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자극적이고 매력적인 부분이 있는지 탐문했다. 그럴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 써졌다. 주로 소설을 썼는데, 흔히 글을 쓰다 보면 작가가 아닌 등장인물이 서사를 끌어간다고 말을 한다. 그 핑계를 대며 내 글 같지 않아도 등장인물이 우선이지, 하며 홀로 변론했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작문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글을 쓰는 게 전처럼 재미있지 않았다. 물론 재미로 쓰는 건 아니지만 내 글 같지 않은 소설을 접하는 게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써서 등단을 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엇이 남게 될까 의문이 들었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복잡한 톱니바퀴 사이에 나뭇가지 하나가 끼인 것처럼 모든 게 부자연스럽고 막막했다.
사람들과 함께 산을 오른 적이 있다. 누군가가 이십 일분 만에 올랐다는 불암산을 아침 일찍부터 걸었어도 정상까지 오르지 못했다. 급기야 내려올 때는 옆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기다시피 내려왔다. 민망하고 수치스러운 날이었지만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정상을 보며 좌절할 때마다 능숙하게 산을 오르던 지인이 말했다. “너무 멀리 보지 말고 지금 당장 발을 보며 걸어. 안 그럼 넘어져.”
정말 그랬다. 정상을 보고 걸을 땐 산이 나를 자꾸 뒤로 미는 기분이었는데 나의 한걸음에 집중하자 산속에 오롯이 들어와 있는 기분이 그제야 들었다.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만족스러웠다.
이제는 글을 쓸 때 무언가 도달할 목표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글쓰기는 별다른 시각적인 수확을 남기지 않는다. 남들에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할 때도 애매모호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을 뿐 나의 내면은 기쁨으로 가득하다. 갓 지은 밥의 뜨끈한 열기가 콧속으로 들어올 때의 충만함처럼 한 편의 글을 끝낸 뒤의 행복은 물결처럼 아롱져 오른다. 그저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글을 짓는다. 가장 쓰기 어려운 것, 제일 쓰기 싫은 부위를 끄집어내 문장 위에 붙잡아 둔다. 이로써 슬픈 장례식을 마치고 나는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자기 계발 저술가이자 경제학자인 공병호는 『한글의 글쟁이들』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용기라고 봐요. 남의 시각 의식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거죠.” 이 말에 동의한다. 용기 내지 않은 글은 타인과 연대하기 어렵다. 다른 사람의 시각을 의식하지 않고 쓴 글이 타인과 연대하는 실마리가 된다는 점에서 반가운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소설가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에서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비유를 재인용해 글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무서움을 재치 있게 설명한다. “마음먹고 팬티를 내린 채 대중 앞에 나서는 것과 같다.” 나도 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때마다 깊은 자괴감과 모멸감에 빠진다. 두려움이라는 섬에 갇혀 자신을 깎아내리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밤에 자려고 누워도 심장이 요동쳐온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은 “소설 쓰기는 바늘로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물을 찾아 아주 작고 연약한 바늘로 끊임없이 써 내려간다. 흔적도 없는 것 같고 미련하고 나태해 보이기까지 하는 작업이다. 글을 쓰는 건 외로움과 마주하는 일이다.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혼자서 무한한 세계를 이끌어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행위다. 당장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먹고 싶은 음식,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와 문자를 뒤로하고 의자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손가락을 움직인다. 열 일 제쳐두고 글 하나 완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참기 힘든 잉어빵의 유혹. 집 근처인데 머리부터 꼬리까지 팥과 슈크림이 가득해 문전성시를 이룬다.>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당연히 쇼핑할 시간도 없고 입는 옷에 큰 관심을 두지도 않는데, 엄마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직도 언니에게 작아진 옷을 물려받아 입는 나를 보고 속이 상했는지 어느 날 얼마의 현금을 건네셨다. 백화점 가서 예쁜 원피스 한 벌 사 입으라고 하셨다. 나는 원피스 입고 갈 데도 없고 그리 필요하지도 않다고 거절했지만, 엄마는 그래도 넣어 두라고 하셨다. 엄마의 시간과 노동이 집약된 그 돈은 그렇게 쉽게 내 주머니 속에 들어왔지만 쉽게 쓸 수가 없었다. 오히려 책상 위에 봉투를 올려놓고 엄마의 마음을 생각했다. 봉투를 볼 때마다 더 진심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원피스보다 더 필요한 키보드를 구입했다. 쓰고 있던 키보드가 갑자기 무한 del키가 눌러지며 애써 쓴 글을 마구 지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사실은 혼자서 짓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애정 하는 마음이 담긴 글이다.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요?”하고 물을 때면 “그냥 똑같이 지내요. 별거 없어요.”하고 얼버무리곤 했다. 증명할 수 없는 일은 설명하지도 말자고 생각했었다. 요즘엔 “다시 글을 쓰고 있어요.”하고 대답한다. 솔직한 내 마음이다. 9년 동안 멈춰있던 생각과 손가락을 움직여 진심을 지으려 노력한다. 정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어디로 난 길인지도 모르겠고, 전진 인지 후퇴인지 그저 제자리걸음인지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단지 나의 슬픔과 연약함이 녹아있는 글을 보고 누군가 공감하고 위로를 받았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을 갖는다. 나에겐 원대한 바람이다. 고통은 한 인간의 세상을 좁아지게 한다. 그러나 그 경험만큼 힘을 부여한다. 나에게 글쓰기는 좁아진 세상을 깨뜨리고 힘을 부여하는 망치질이다.
2022.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