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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Jul 12. 2024

재취업과 글쓰기 사이에서

작가란 누구일까?

"유명하다는 베이커리 카페에 갔더니 죄다 여자들이야. 남자는 다 일하러 가고, 여자들은 남자들이 벌어온 돈 펑펑 쓰면서 애들 학교 보내고 다 카페에 와 앉았더라."


  일주일에 한 번씩 안부전화를 하라던 시어머니는, 전화기 너머에서도 귀총이 따갑도록 오전에 카페에 와 있는 여자들을 흉보았다. 나는 슬그머니 전화기를 귀에서 떨어트렸지만, 시어머니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본인은 처음 갔지만 저 여자들은 매일 저렇게 카페를 돌아다니며 수다만 떨고 다닐 거다, 그 남편들이 너무 불쌍하다, 남편들은 본인이 벌어온 돈을 쓰지도 못하는데 여자들이 카페 다니면서 다 쓴다나.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돋을볕아, 너는 안 그러지?"


  '그 여자들'이 어떤 사람인진 모르지만 맛있는 빵과 커피는 누구나 좋아한다. 각자가 낼 수 있는 가용시간과 취향이 다를 뿐이다. 본인이 낼 수 있는 시간에, 선호하는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왜 탐탁지 않아 보이는 걸까? 어머니 본인도 그중 한 사람에 속해있었을 텐데 왜 저렇게 화가 나 있는 걸까? 그 말을 나에게 함으로써 어머니가 얻는 이익은 무엇일까?


  우리는 외벌이다. 남편이 회사에 나가고, 나는 아이들을 양육하고 집안일을 챙긴다. 남편도 나도 각자 삶의 최전선에서 가족을 위해 애쓴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이 남편을 대변할 수 없듯이, 내가 하는 집안일도 나를 대변할 순 없다. 그러나 종종 눈에 보이는 돈이 최고의 가치로 쳐지며, 소득이 있는 사람이 지출을 줄이는 사람보다 더 높이 평가받는다. 지출에 상관없이 소득이 있는 사람이 생산성 있는 사람으로 대우받는다.


  학창 시절 사회시간에 '실업'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그때의 충격이 아직도 남아있다. '실업자'에 대한 경제학적 정의가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연령의 사람들 중 취업상태에 있지 않은 무직자"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최근 졸업자나, 이직 준비자, 질병 치료자 등도 해당되며 경제활동인구는 취업자와 실업자가 합해진 숫자라고 했다. 사람은 취업자와 실업자 두 부류로 밖에 나눠지지 않으며, 자발적 실업이나 비자발적 실업 상관없이 직업이 없는 성인은 경제학적 시각으로 봤을 때 모두 실업자라는 것이다. 경제적 수입 활동이 없는 사람은 모두 '직업을 잃은 사람'이라니.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이셨다. "주부도 사회의 잉여인력, 실업자에 속합니다."


  주부는 경제 활동이 없는 사람인가? 당장 눈에 보이는 소득을 거두긴 힘들어도 많은 지출을 줄인다. 건강한 주부는 가족의 생명을 돌보고 깨끗한 옷과 필요한 음식을 제공하며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아이들을 지킴으로서 사회적 역량을 강화하고, 남편의 근로 소득 증대를 돕는다. 초등학생인 첫째 아이에게 "엄마도 밖에 나가서 일할까?"하고 물으면 아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엄마는 이미 일하고 있잖아. 우리를 이렇게 잘 돌봐주고 있는데."




유모차 홀더에 꽂아둔 커피


  아이가 어렸을 적, 유모차를 끌고 카페에 간 적이 있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거의 없는 일이었는데 아이를 데리고 마트에서 장을 보느라 이미 진이 다 빠진 상태라서 카페인 수혈이 시급했다. 피곤해서 눈도 떠지지 않았다.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며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데, 목에 사원증을 걸고 옆테이블에 앉아있던 남녀가 내가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도 일 그만두고 유모차 끌고 문화센터나 다녔으면 좋겠다. 누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고 얼마나 좋아."


  순간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는 그 눈빛들이 너무 날카로웠다. 도망치듯 카페에서 나왔다. 그날 이후 나는 카페에 더욱 가지 않게 되었다. 내가 정말 사회에 필요 없는 벌레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사람들 눈에 띄면 비난받고 환멸 받는 그런 존재. 타인의 눈을 피해 어딘가에 꽁꽁 숨어 있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공격받을지 모를, 껍질을 잃은 민달팽이 같은 신세였다. 왜 어린애를 데리고 밖에 나왔냐고, 돈 안 벌고 애만 보니 편하고 좋지 않냐고, 아기는 세 돌까지는 엄마가 키워야 된다고, 너무 엄마랑만 있으면 아기의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내 노력과 상관없이 모든 게 다 잘못됐다 평가받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유수유와 아이 돌보기로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던 시절이라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당시 남편은 야근과 주말 특근이 일상이었다. 밤늦도록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아기띠를 하고 서서 밥을 먹는데, 아기띠의 허릿줄이 배를 압박해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아기는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울기 때문에 화장실에도 아기띠를 하고 가느라 변비에 시달렸다. 어떤 이들은 약자를 혐오하고 비난한다.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찾아 짓밟으며 그래도 내가 제일 밑바닥은 아니라고 자아도취감에 빠진다. 자신의 인생을 타인에 대한 혐오로 치켜세우고 싶어 한다. 본인이 이해하지 못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힐난한다.


  아기였던 아이들이 어느덧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이 되었다. 요즘 나는 어린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애틋한 마음이 든다. 대부분 아기가 귀엽다고 아기를 쳐다보지만, 나는 아기띠를 메고 유모차를 미는 사람을 바라본다. 얼마나 곤고할까? 하고. 지금까지 내가 '주부'이자 '엄마'로 버틸 수 있었던 건 남편의 이해와 위로 덕분이었다. 지금 우리는 세상에 맞서 싸우는 피 흘리는 전우이자, 등을 맡길 수 있는 동지다.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오면 우린 서로에게 이렇게 인사한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이 한마디에 하루 동안 쌓인 긴장이 녹아내린다. 눈으로 보지 않았어도 회사에서 상사에게 깨지고, 후배들에게 은근한 소외감을 느끼고, 동기라고 믿었던 이들이 순식간에 떠나는 것을 목격하며 남편은 전력을 다해 견디다 왔을 것이다. 저녁 식사를 하며 오늘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음을 주고받는다. 누가 더 힘들었냐 대결이 아니라 힘든 마음 성토 대회랄까. 서로의 대나무 숲이 되어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친다. 고개를 끄덕이고 따뜻한 눈망울을 적시며 "그렇구나, 진짜 힘들었겠다.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어? 전에 말한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하며 낮에는 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과감 없이 내뱉는 것이다. 말에는 힘이 있어서 이렇게 안전하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치유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최근엔 둘째가 유치원에 가면서 낮시간이 좀 더 확보되었다. 갑자기 없던 시간이 생기니까 오히려 초조해졌다. 10년여간 아이들만 보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내가 오롯이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기니까 뭔가 효율적인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하루에 한 방씩 대청소를 하고, 베란다 창틀을 닦아내고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읽어나갔다. 초등학교 학부모 연수에도 처음 참가해 보고 저녁 식사도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좌불안석이었다. 쉬는 게 불편했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정말 '남편 돈이나 쓰는 나쁜 아내'가 되는 기분이었다.


  나도 돈을 벌고 싶었다. 아침에 예쁘게 출근 준비를 마치고 외출해서,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무료 보육이나 돌봄이 아닌 내 통장에 꽂히는 연봉 얼마의 경제 인구가 되는 것이다. 나이가 조금이라도 더 어릴 때 뭐라도 해보자, 하다못해 자격증이라도 따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몇 날 며칠을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고민하고 검색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나 찾을수록, 알수록 절망이 더 커졌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현직자들의 고민이 더 크게 와닿았다. 무슨 일을 하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이 양육과 병행하기가 힘들었다. 그 말인 즉, 등하원 도우미가 필요하고 집에 CCTV를 설치해야 하며 아이들에겐 핸드폰과 여러 학원 수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벌 수 있는 소득은 거의 없거나 어쩌면 마이너스 일지도 몰랐다.


  하루하루 일자리나 자격증을 찾아보고 밤마다 남편과 상의했다. 그때마다 남편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싶어서 남편의 생각을 자세히 물었다.

"오빠 회사 사람들 중에 외벌이인 사람도 있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낸대?"


  남편은 내가 '오빠'라고 불러주는 걸 좋아해서 여전히 호칭은 오빠다. 남편은 샐러드 위의 연어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있긴 있을 걸. 거의 다 맞벌이긴 한데 있긴 있던 것 같아. 나이 좀 드신 분들 중에 한 두 명? 그런 분들은 좀 힘들어하시긴 하지. 숨을 곳이 없어 보인 달까?"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되물었다.

"숨을 곳이 없는 건 오빠 얘기 아냐? 숨을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섭섭하긴 하지만 그래, 그렇게 느껴질 수 있겠다. 근데 외벌이가 그토록 적은 건 충격이다."


  남편이 속한 파트 사람들만 해도 수십 명은 될 텐데 그중에 한 두 명만 외벌이라니. 게다가 나이 든 사람들 한 두 명만 그렇다는 건 젊은 사람들은 다 맞벌이라는 얘기다. 그런 분들의 상황을 물어보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 사람 같다. 아내가 어디 은행의 지점장이거나 건물을 몇 채 보유하고도 생활비를 줄이려고 공기업 사택에서 살고 있다거나, 아니면 승진을 위해 아이는 아주 멀리 할머니댁에서 10여 년째 따로 살고 있다거나 하는 사연들이다.


  남편은 내가 알아본 아르바이트나 일자리, 새로운 교육이나 자격증에 대해 말할 때마다 시종일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최저시급 받고 아르바이트 몇 시간 하고 집에 와서 일주일간 앓아누울 것 같은데. 그냥 집에 있어."


  비웃는 게 괘씸하지만 내 생각에도 병원비가 더 나올 것 같아서 참는다. 지금 일하는 건 경력을 늘릴 순 있지만 소득에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불안해서, 뭔가 내세우고 싶은 마음에 시작하려는 마음이 크다. 내가 일주일 넘도록 매일 새로운 일에 대해 말하자 남편이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한다.


"정말 일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내 생각엔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네가 원한다면 나이가 들어도 지금 말하는 직종의 일들은 다 할 수 있을 거야. 그보단 글을 쓰는 게 낫지 않겠어? 그게 너에게 훨씬 이득일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그래도 세상에 찌들어서, 매일 회사에서 주눅 들어오는 남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게 놀라웠다. 남편을 수영장에 등록시키고, 여러 모임에 내보낸 게 도움이 된 걸지도 몰랐다. 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늘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글'. 돈도 되지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고 아무 내세울 것도 없으며 누구나 쓸 수 있는 고작 '글'이라니.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는 글이라니.


  소설 공모전 '대상'에 선정됐지만 알력에 의해 취소됐단 소식을 접했고, 대학원 문예창작 학위도 교수 간의 다툼으로 미끄러졌다. 신춘문예 최종심의까지 갔지만 그뿐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글짓기 관련 상이 100여 개가 되지만 책장 깊숙이 박혀 느린 잠을 자고 있다. 석사 학위가 미끄러진 뒤 다신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던 글을, 아이를 낳고 키우며 자아 존재감을 잃어버린 뒤 다시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쓸 때에야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글을 쓰고 나면 가슴을 옥죄던 깊은 어둠에서 해방되었다.


  첫째가 9살, 둘째가 4살 해던 해에, 그러니까 글을 놓은 지 9년째 되던 해에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이들을 맡겨놓고 일주일에 한 번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다. 여전히 운전이 무서웠지만, 왕복 3시간을 운전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처음으로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지었다. 1년간의 글쓰기 모임이 끝날 즈음엔 '브런치'를 시작했다. 글쓰기 모임도, 브런치도 남편의 권유였다.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난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일주일에 한편은 올리려고 하는데 어떤 날은 머리를 쥐어짜도 글감이 떠오르지 않고, 어떤 날은 쓰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허우적대기도 한다. 이런 글을 써도 되나 두렵기도 하지만 그저 쓴다.


  지금까지 내가 작가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장강명 작가의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을 읽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소설가가 직업임을 강조하며 소설가의 루틴, 창작과 돈벌이에 관한 것들을 상세하게 다루는 책인데, 출근하듯 책상 앞에 앉아 꾸준히 무언가를 써내야 하는 작가의 고뇌와 그 책을 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업계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와있다. 한마디로 '작가'라는 세속과는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예술가적 이름이 사실은 어디 기업의 회사원처럼 똑같이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장강명 작가는 소설가의 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전업 예술가의 고독은 삶 자체에 흥미를 잃게 하는, 피로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는 어떤 긴 작업을 혼자 해야 하는데, 그 작업을 왜 하는지, 왜 그런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달리 없다. 그걸 남한테 설명하다 보면 비참한 기분에 빠진다. 왜냐하면 대체로 그는 세속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고, 의도와 결과물도 딴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설명해 줘도 남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적나라한 작가의 고백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질문으로 떠다녔다. '나는 왜 글을 쓰지? 작가는 어떤 사람이지?'


  장강명 작가는 소설가로서 추구하는 일상을 이렇게 서술한다. "내가 원하는 작가의 이상적인 일상은 이거다. 아침에 일어나서 소설 원고를 쓰기 시작, 배고플 때 식사하고, 낮잠을 조금 잔 뒤 또 원고를 쓰고, 다시 배가 고파지면 두 번째 끼니를 먹고, 또 원고를 쓰고, 자는 것. 그 사이사이에 운동을 하고, 집 청소를 하는 것. 한마디로 교도소 독방에 갇힌 죄수 같은 생활이다." 그 말에 전에 읽은 김연수 작가의 책이 떠올랐다. "작가에게 중요한 건 오직 ‘쓴다’는 동사일 뿐입니다. ‘잘 쓴다’도 ‘못 쓴다’도 결국에는 같은 동사일 뿐입니다. 잘 못 쓴다고 하더라도 쓰는 한은 그는 소설가입니다." <소설가의 일>에서 김연수 작가는 지금 쓰고 있는 사람을 작가라고 명한다. 내가 쓴 글을 누군가 돈을 주고 사지 않더라도, 내 글이 책으로 실리지 않더라도 오직 쓰고 있다면 작가다. 작가는 단지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것도 매일 꾸준하게.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일을 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쓰고 또 쓰고 아무 희망이나 두려움 없이 매일 쓰는 사람이 작가다.




  시대가 변했다. 사람들은 돈을 내고 책을 사기보다 화면으로 읽거나 공유하길 원한다. 나 또한 이사 때마다 책이 너무 큰 짐으로 다가온다. 내 글이 책으로 나온다면 과연 몇 명이나 돈을 주고 사서 읽을까? 보통 인세보다는 강의나 방송 출연료 등으로 돈을 번다고 하니 책을 낸다고 돈을 벌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 어떨 땐 수십 명, 어떨 땐 수만 명의 사람이 글을 읽고 댓글을 달거나 공감을 표하기도 한다. 다음 글을 기대하며 '구독'을 누를 때도 있다. 텍스트와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에, 친히 내 글을 클릭해서 귀한 시간을 내어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재취업도, 글쓰기도, 아이 양육이나 사람 간의 관계도 어쩔 땐 '돈'이라는 거대한 관문을 뛰어넘는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일과 관계, 노동과 시간이 과연 헛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말과 시선이 내 인생을 바꾸도록 큰 힘을 부여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그러한 물음에 용기를 내어 '아니요'라고 답하고 싶다.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뛰어 넘는다. 진짜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의 미래를 두려워 할 수 없고, 진짜 글을 쓰고 싶다면 튀르키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말처럼 '바늘로 우물을 파듯이' 글을 써야 한다. 두려움이 사랑을 이기려할 때마다 미국의 소설가 '래이 브래드버리'의 명언을 되새긴다. "매일 글을 써라, 강렬하게 독서해라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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