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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Dec 01. 2021

미니멀리즘이 아니어도 괜찮아

마개를 막은 항아리는  속이 비어 있으므로  거친 물결 위에도 떠 있다.

미니멀리즘이 아니어도 괜찮아

2021.12.1



"피카소는 살면서 사소한 일상에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더 이상 지내기가 힘들어질 정도로 집 안에 물건이 가득 차면 그는 그냥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갔다." _모니 체르닌․멜리사 뮐러, 《피카소의 이발사》


이 문구를 읽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사소한 일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니! 집안에 물건이 가득 차면 그냥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 된다니! 지금과는 다른 시대와 환경이니 그게 가능했을 테지만,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 사소한 일상에 쓰는 시간들로 하루가 꽉 차 있고, 정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초라한 시간만 낼 수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지내기가 힘들 정도로 집 안에 물건이 가득 차면, 이사를 알아보지만 저 집 값에 놀라고 내 처지에 개탄하며 물건 정리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렇게 물건 정리를 시작했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면서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조금은 적어지고, 나 또한 조금의 여유 시간이 생기면서 물건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러 매체 속 '미니멀리즘'은 너무 깔끔하고 우아하고 트렌디하며 여유 있어 보이지만 내 삶은 그렇지 못하다. 이곳저곳에서 물려받은 아이 물건들과 작아진 옷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제 멋대로 살고 있다. 심지어 첫째는 재활용품을 이용한 만들기를 매우 좋아해서 아이 방에 쌓인 상자며 플라스틱, 캔, 포장재들이 가득하다. 





우선 부피가 큰 물건부터 처분을 시작했다. 기증할 것, 물려줄 것, 팔 것, 버릴 것으로 나눴다. 기증센터에 수시로 들락거리고, 중고거래 사이트에 물건을 사진 찍어 올리고 만날 약속을 잡아서 거래하고, 50리터 쓰레기봉투를 사서 몇 번이나 갖다 날랐다. 가장 애매한 건 내 눈에는 쓰레기지만 아이 눈에는 보물인 물건들이다. 예를 들어 택배 박스로 만든 아주 큰 공룡이나 몇 백개나 되는 종이비행기, 종이 딱지, 개펄에서 주운 낡아 빠진 자동차 장난감, 밖에만 나가면 주워오는 비비탄, 돌멩이, 나뭇잎, 나뭇가지, 재활용품들로 만든 수많은 작품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 되었든 몇 달 동안 찾지도 않았던 물건을 처분하고 나면 꼭 찾는다는 데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역죄인이 되어 아이의 눈물, 콧물, 원망을 닦아내줘야 한다.



시간도 많이 들고 품도 많이 드는 게 정리다. 하고 나면 깔끔하지만 웬만해서는 티도 잘 안 난다. 자칫하면 오히려 생활이 불편해지고 정리해둔 물건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처분하고 나면 필요해지고 갖고 있자니 짐이 된다. 



알레한드라 코스텔로는 "정리는 커다란 테트리스 게임이다"라고 했다. 트렁크에 짐을 싣든, 집안을 정리하든 정말 '테트리스 게임'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잘 정리되면 보기 좋지만, 다시 쓰려고 보면 위엣 것들을 빼내야 한다는 점에서도.



한동안 '정리 휴지기'에 들어섰다. 이전에 정리한 것들과 친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정리하느라 다른 일들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정리는 멈춤이지만 새로운 물건은 끊임없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정리해둔 물건은 아이의 하원과 함께 순식간에 거실 바닥에 엎어져 춤을 춘다. 어떨 때는 차라리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갔으면, 싶기도 하다.  집이 더 넓어지면 물건도 좀 더 적어 보이지 않을까? 정리를 덜하고 버리지 않아도 제자리가 있으면 깔끔해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누구나 피카소처럼 짐이 늘어난다고 이사를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나는 대업을 위해 하찮음을 다 솎아내기보다는 덜 성공해도 좋으니 일상의 때를 묻혀가며 사람 냄새 풍겨가며 그렇게 살고 그렇게 쓰련다. 훗날 일생일대의 역작을 쓰고자 과감한 가지치기를 하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하찮음의 수고와 기쁨을 다 버리지는 않으련다." _박총, <내 삶을 바꾼 한 구절>



'사소한 일상'이라는 게 정말 시간 낭비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에 우리가 바라는 건 사소한 일상이 아닌가? 일상이 빠진 인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정말 '사소한' 일들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또한 누군가의 일상을 더욱 깎아 넣은 삶일 뿐일 것이다. 그 누군가의 곱절의 희생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일상의 때'가 묻어 있고 사람 냄새 풍기는 집이 훨씬 정답다. 훨씬 마음이 편안하다. 제멋대로인 가구들이 통일성이 없어도, 빈 벽 없이 물건들이 테트리스 되어 있어도, 미니멀리즘이 아니어도, 우리는 즐겁고 아이들은 자란다. 다양한 책과 분리수거 용품들이 가득한 자기 방을 첫째는 정말 기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해서 방에만 들어가면 마음이 무척 편안하다고 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봐도 말끔히 정돈된 방보다는 아끼는 물건들로 채워진 방을 더 기뻐했던 것 같다. 


정리의 목적이 무엇인가? 매끈하게 비워진 집인가? 사진이 잘 나오는 방인가? 내가 물건을 정리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니다. 가족이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고 안 쓰는 물건을 치우는 정도면 족하다.



마개를 막은 항아리는

속이 비어 있으므로

거친 물결 위에도 떠 있다.

누구든지 중심에 가난의 바람이 불면

이 세상 거친 물결에 평안히 떠 있을 것이다.

_루미,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는 일찍이 자족을 노래했다. 마개를 막은 빈 항아리는 거친 물결 위에도 떠 있다. 속이 가득하고 무거운 것들은 죄다 물에 빠져도 빈 항아리는 여유롭게 둥둥 떠 있을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중심이 정결하고 맑은 사람, 지금으로도 괜찮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어떤 물결이 일어도 평안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이 아니어도 괜찮다.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고, 안전한 집 안에서 하고 싶은 만들기를 마음껏 할 수 있고, 자신의 물건을 소중히 돌볼 줄 알고, 무엇보다 알 수 없는 평온함이 가득한 집. 이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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