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란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다.
진심이란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다. 마음 한구석에 등대처럼 떠 있는 진심을 말할 때 파도처럼 일렁이는 슬픔이 밀려온다. 전구색 가로등이 밤길을 비춰주는 골목길을 걸었다. 편의점 테이블 위에 누군가 컵라면을 먹다간 흔적이 보였다. 국물이 담긴 용기 밑에 뜯긴 비닐이 날아가지 못하고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었다. 대학생 때 중앙동아리 대표를 했다. 당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도망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약하고 쉽게 부서지는, 비닐같이 가벼운 내 위에 ‘대표’라는 무거운 의자가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때의 길은 아니지만 비슷한 감정이 드는 날이었다>
올해 8월, 내 마음은 천릿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집 누수 공사로 인해 부모님 댁에 한 달간 대피해 있을 때였다. 언니들도 종종 왔고 손님들도 가끔 찾아왔다. 우리 남매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를 소개할 때 “여기는 다 교사들이여. 국민핵교 선생님.”하고 말한다. 언니 둘은 부모님의 의견을 따라 교대에 갔고 교사가 되었다. 나는 가지 않고 방황하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헬렌 시수는 물질인 우리에게 익명은 곧 죽음을 뜻한다고 했다. 어른들이 우리 자매를 그렇게 소개하며 감탄사를 내뱉을 때마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뒤로 돌아서 있을 뿐이었다. 익숙한 광경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전국에서 알아주던 언니들의 성적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걱정덩어리 혹은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나는 옆에 같이 서 있지만 어느 곳에도 없는 사람이다. 사람이 아닌 눈사람에게 사람이라 부른 누군가의 잔인한 부름처럼 이 집 딸들은 모두 교사야, 라는 말에 나는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올해 8월, 남동생이 공기업에 들어갔다. 동생이 시험을 한 단계 한 단계 통과할 때마다 부모님이 더욱 긴장하셨다. 아빠는 동생에게 차마 전화하지 못하고 매번 나에게 전화해 너무 떨려서, 너무 기뻐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셨다. 최종 합격 후 부모님 앞으로 꽃다발과 케이크가 배달됐다. 부모님은 케이크를 드시지 못하고 그대로 냉동실에 박스채 얼려버리셨다. 그렇게 부모님 마음에 동생은 자부심으로 박제되었다. 내가 처음 교직원에 합격했을 때에도 부모님은 이렇게 기뻐하셨을까? 기쁜 마음과 씁쓸한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동생이 태어났던 이 십여 년 전 8월, 게다가 15일인 광복절에 나는 더 이상 ‘돋을볕(브런치 작가명 대체)’이 아니라 ‘아수 배기’가 되었다. 충청도에서는 남동생을 본 손위 누나에게 ‘아수 배기’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나를 칭찬했다. 언니들 중 한 명이라도 아들이었으면 네가 태어나지 못했을 텐데, 언니들에게 고마워하라던 초등학교 선생님의 짙은 농담처럼 나는 또 동생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올해 8월, 친하게 지내던 40대 언니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시간이 없어서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공부를 했다는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마음은 또다시 폭삭 무너져 내렸다. 행정학과까지 나와서 공무원 시험을 보지 않는 나를 향해 누군가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등록금 싸고 장학금 주니 그 학교 계속 다닐 거여? 재수 안 할 거면 고시 준비를 해, 당장.” 대학 입학 후 찾아갔던 모교에서 나를 아끼던 선생님들이 한숨을 폭폭 내시며 하시던 말씀들이 떠올랐다. 선생님 말씀을 등에 지고, 시멘트 벽돌같이 무거운 공무원 수험서를 한가득 안고 노량진을 오가다 쓰러졌다. 버티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개의 알약을 목구멍에 밀어 넣다가 비로소 깨달았다. 살기 위해 글을 써야겠다. 이지러지고 어질러진 내 인생을 주워 담았더니 ‘글’이라는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의 작은 책상. 글 쓸 시간을 내느라 점심으로 간단히 꼬마김밥을 먹었던 날>
올해 8월, 대표를 할 때 보았던 편의점 컵라면이 생각났다. 글쓰기는 나를 날아가지 못하게 붙잡아주는 무거운 의자다. 들숨과 날숨처럼 글자들이 흐른다. 사유의 토막을 잘라 절단면을 들여다보면 결코 멈추지 않는 ‘글’이라는 생명 공급장치가 붉게 타오른다. 익명성은 우리가 운명적으로 타고난 것 아니던가. 우리는 이름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지만 본래 우리는 이름이 없는 물질로 태어났다. 김용택 시인은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에서 “나무들은 계획적이다. 정면으로 꽃을 피우지. 나무들은 사방이 정면이야, 아빠.”라고 이야기한다. 나무들은 사방에서 꽃을 피운다. 우리들도 사방에서 꽃을 피운다.
작성일 2021.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