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감정

누군가 화를 낼 때 진심으로 동조하고 공감해주는 일은 큰 수고를 요한다.

by 돋을볕

교사인 언니는 일정한 스케줄에 맞춰 움직인다. 말하는 것을 좋아해 자주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는 나도 요령이 생겨 몇 시에 울린 전화벨인지에 따라 용건을 대략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세시 반에 울리는 전화. 퇴근을 앞두고 빈 교실에 앉아 그날의 업무 스트레스를 토로한다. 반 아이들을 괴롭히는 덩치 큰 아이의 지도 반항이라든가 부모의 무관심으로 인한 대처 불가능에 열을 올린다.


네시 반에 울리는 전화. 아기를 좋아해서 아이를 보여 달라는 영상 통화다. 뭘 하는지, 뭘 먹는지, 뭘 좋아하는지 물어보며 조카에 대한 애정을 듬뿍 표한다.


그리고 여섯 시 이후에 울리는 전화. 대부분 목소리가 올라가고 말은 더 빨라지고 날카롭고 격앙되어 나를 찾는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더라도 안전하게 험담을 뿜어낼 대상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엄마가 여섯 시에 퇴근하시는데, 엄마와 통화 이후 억울한 감정을 나에게 푸는 것이다. 엄마 이야기는 같은 피와 성을 나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오해와 뒤탈이 없을 테니까.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셔서 종종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농산물을 홍보하고 판매할 때가 있다. 요즘엔 햇호박고구마가 나오고 있어서 해마다 찾아주던 지인분들과 직장 사람들에게 알리는 중이다. 언니도 학교 사람들에게 홍보글을 돌려 주문을 받았다. 그중에는 아는 사람도 있지만 말 한번 섞어보지 않은 동료들도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오늘 엄마에게 연락이 와 고구마가 조금 모자라서 더 캐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번 주말에 비가 와 다음 주말까지 기다렸다 캐야 한다. 다음 주에 내가 내려가면 말이다! 엄마가 주중에 직장생활을 하시고 아빠는 홀로 농축업을 하시느라 바빠서 중노동인 고구마 캐기를 감당할 수 없다. 언니는 모르는 동료 몇 사람에게 연락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는데 엄마는 너무 쉽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고 한다. 작년에 나 또한 같은 일을 겪었기에 그 심정을 안다. 나에게도 엄마는 같은 말로 상처를 줬다.


“그럼 어떡한댜? 죄송하다고 엉엉 울기라고 해야 하나? 응엉응엉~”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가슴 깊이 탄식했다. 울라는 게 아니라, 믿고 주문해준 사람들에게 신뢰를 깨뜨리는 행위라고, 게다가 지인과 모르는 사람에게 연락해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 게 얼마나 큰 어려움인지 아느냐고, 당연히 미안해하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당시 엄마는 알겠다고 했지만 모르셨나 보다. 언니는 말했다.


“주문받느라 고생했다고,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엄마가 고맙다고 할 줄 알았어.”

누군가 화를 낼 때 진심으로 동조하고 공감해주는 일은 큰 수고를 요한다. 그 사람의 분노가 나에게로 전이돼 굳이 낼 필요 없는 부화를 만들고, 내 일로 받아들여 때로는 더 오래 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공감은 매우 중요하다. 나 또한 이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만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지금 언니가 나에게 구하는 건 자문이 아니라 공감이다. 내가 이렇게 억울하다고, 매우 화가 나고 답답하다고 하소연할 때 , 그랬구나 정말 어처구니없겠다. 엄마가 잘못했네. 언니 바쁜데 정말 고생했다고 토닥여주는 일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가 쓴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스토아 철학을 연구하면서 나는 ‘자기 자신 외에 상처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라는 에픽테토스의 문장과 부딪혔다." (7-8면)


"자신을 방어하여 상처를 피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반복해서 받는 오래된 상처를 샅샅이 뒤져 보면, 그 상처로 인해 다시 상처받든지 아니면 화해하고 그것을 놓아버리든지 하는 것은 내 책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면)


나 자신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그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이럴 경우에 내가 또 기대했구나,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의 말은 실행하기는 어렵지만 실행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내면에 자유를 선사한다.


다행히 언니는 이 구절에 위로를 받은 듯했다. 지난번에 고춧가루 사건 때도 내가 얼마나 열받았는지 아냐며 그 일까지 더해져 부화가 치민다고 했다. 고춧가루 사건은 지난달 일어난 일이다. 마찬가지로 지난달부터 햇고춧가루가 나오는 중이다. 다른 농산물들은 대부분 도매업자에게 넘기지만, 고객과 직거래를 할 수 있는 물품의 경우 엄마는 우리에게 부탁하신다. 고춧가루, 고구마, 쌀 등. 농사지은 물품을 직접 판매하면 생산자는 우리는 단골을 확보할 수 있고, 도매가보다 좀 더 나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 구매자는 물론 시중가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고품질의 신선한 제품을 받을 수 있다. 마음에 들면 단골이 되는 즐거움도 있다. 요즘엔 집에서 김장을 담그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어 고춧가루 주문량이 마땅찮다.

나도 몇 군데 팔아주었고, 언니도 주변 사람에게 주문을 받았다. 그런데 양이 문제였다. 엄마 입장에서는 택배비도 부담해야 하는데(물품 하나당 5-6천 원이 기본이다) 겨우 한 근을 받아온 것이다. 고춧가루 한 근은 400g이다. 엄마가 택배비도 안 남는 다며 언니에게 다음에 내려와서 직접 갖다 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고 한다. 언니는 처음부터 그럼 몇 근 이상이라고 말했어야 한다며 바빠서 그럴 수 없다고 싸웠단다. 엄마도 전화 오고, 언니도 전화 오고…….


언니 입장에서는 엄마가 한 근 가격으로 알려줬으니 한 근도 택배비를 부담하고 보내야 맞다고 생각한다. 엄마 입장에서는 지금껏 최소 다섯 근 이상씩 주문했으니 열근 이상은 안돼도 다섯 근은 넘어야 고추를 심고 따서 말리고 방앗간에 맡긴 수고비가 나온다. 마음에 공감해주고 서로의 입장이 이랬을 거라고 말하니 둘 다 수긍했다. 그런데 언니가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다가 이번에 또 그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지나간 이야기까지 다 꺼내면 끝도 없다고 일정 선에서 말을 잘랐다.


내 생각에 엄마는 힘든 것을 힘들다고 말하면 더 힘들어진다고 믿는 사람들 중 한 명인 것 같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이라 치부되는 슬픔, 화, 공허감, 허탈감, 억울함 등에 대해선 거들떠도 안보려는 것 같다. 나는 감정에도 감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소홀히 하고 무시하는 감정은 나를 떠나기 마련이다. 그럴수록 마음은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내딛을 공간은 부족해진다. 슬픔을 견디고 아픔을 붙잡고 살아가는 타인과 연대가 힘들어진다. 엄마는 공감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누구 하나 수고했다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애써 주어 고맙다고 말하는 이 없었다. 평생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며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살기에도 역부족인 인생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보살핌도 없이 퍼주고 나눠주고 섬기고 희생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자녀인 우리는 이만큼 자라서 4년제 대학에, 하고 싶은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나왔다. 우리 눈에 보이고 당연한 것들이 엄마에겐 그렇지 않다. 엄마는 선하고 인심 좋고 성실하다. 굳이 성격 유형으로 꼽자면 성취 주의자에 문제 해결형이다. 하지만 누가 엄마를 욕할 수 있을까? 전쟁 이후 태어나 밀레니엄 세대를 살아온 대부분이 먹고살기 바쁘다는 미명 아래 감정을 무시당하고 자아를 숨기고 버티며 참아냈다. 산업 역군을 최고로 치는 시대에 열성적으로 자녀들을 가르치고 성과를 이끌어냈다. 지금 내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이루어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절규가 있었다.


먼 시간이 흘러 내가 엄마의 나이가 되면 내 자녀들이 이런 글을 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너무 감정적이라고, 혹은 내가 모르는 전문용어들과 기술을 써가며 나를 분석하려 들 수도 있다. 바라건대 그때의 나는 이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넘기고, 그래 엄마로서의 나는 그런 사람이다 하고 웃고 말아야지.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지금 엄마의 모습이다. 엄마와 다퉜다고 생각한 다음 날에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밥은 먹었어?”하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엄마는 부정적인 감정이 없는 공감능력제로자가 아니라 모든 감정을 뛰어넘은 게 아닐까. 우리가 울고불고 넘어야 하는 모진 언덕을 이미 무수히 많이 지나와 그 정도는 별 게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까지 상관하다간 쉽게 탈진하고 만다, 거친 옹이가 움푹 파인 나무 둥지처럼 인생 나는 법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겸손함을 반지에 새겨 넣었다는 다윗 왕처럼 혹은 이미 자녀들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어 껍데기만 남은 소라게처럼.



2022.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