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 대한 관심이 생명을 살린다.
2022.04.25
얼마 전 이사 온 집은 이 동네에서는 흔치 않게 풍경이 탁 트여있다. 베란다에서 내다보면 가까이는 12차선 도로가 커다란 나무로 둘려있고, 복잡한 신호등이 비추는 길에는 넓은 사거리가 있다. 사거리를 중심으로 두 면은 중심상가, 두 면은 큰 공원과 우리 집이 있는 아파트 단지로 나뉜다. 근처에 지하철역과 큰 병원, 학원가, 지구대가 있어 쉬지 않고 많은 차들이 지나다닌다. 우리 집에서는 이 모든 풍경이 한눈에 내다보이는데 새벽 6시부터 아침 9시까지는 수많은 회사의 셔틀버스가, 9시 이후부터 오후 6시까지는 각종 시내버스와 광역버스들이, 오후 6시부터 밤 10시까지는 12차선 도로를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노란 학원 버스들이 즐비하다. 경종을 울리는 구급차와 수시로 순찰을 도는 경찰차도 쉽게 볼 수 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동네다 보니 다양한 일이 쉬지 않고 일어난다. 어디서나 그렇듯 훈훈한 미담과 심장을 덜컹거리게 하는 일들이 질서 있게 뒤엉켜 흐른다.
며칠 전에는 그 큰 사거리에서 2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또래의 남성에게 납치당하듯 차에 끌려 들어가며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어린아이가 길을 건너다 신호를 무시하고 우회전하는 택시에 치일 뻔한 장면도 목격했다. 주운 돈과 카드의 주인을 찾는 게시판 글도 보았다. 비 오는 날 골든 레트리버를 산책시키다 육교에서 미끄러져 발목이 돌아간 50대 남성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같이 도운 일도 있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남는 일은 바로 ‘느티나무 할아버지’ 사건이다.
내가 사는 수원은 정조대왕의 발자취가 가득한 곳이다. 화성행궁이나 수원화성뿐만 아니라 방화수류정, 연무대, 만석공원, 융·건릉 등 곳곳에서 오랜 숨결을 만나 볼 수 있다. 매해 가을에는 서울시 창덕궁에서 수원을 지나 화성시 융릉까지 총 59km에 걸친 ‘정조대왕 능행차’를 재현한다. 이때 우리 집 앞 도로도 이 행렬과 풍악으로 가득 채워지는데 그 광경이 정말 경이롭다. 특히 그 웅장한 행렬이 500년도 넘은 느티나무 앞을 지날 때면 어딘가 신령한 장소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마저 든다.
2006년 산림청 주관 ‘대한민국 보호수 100선’에 선정된 느티나무 할아버지는 단오공원을 커다란 새의 날개처럼 가득 품고 있었다. 나무 앞 안내문을 보면 단순한 노목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부터 이 느티나무는 전쟁처럼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치기 전에는 구렁이 울음소리를 내었다고 전해진다. 정조는 화성을 쌓을 때 이 느티나무 가지를 잘라서 서까래로 썼다고 한다. 매년 단오에는 청명산 약수터에서 산신제를 지낸 후, 이 느티나무 앞에서 당산제를 지내왔다. ‘청명단오제’라 불리며 인근 사람들에게 풍성한 즐거움을 주는 행사였다. 그런데 이 느티나무 할아버지가 쓰러진 것이다. 수많은 전쟁과 사건을 이겨낸 느티나무 할아버지가 유난히 비가 많이 오던 날 천둥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어떤 이는 그 소리가 ‘우지끈’이라고 했고, 다른 이는 ‘쩌억’이라고 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전에 들어보지 못한 괴상한 울음소리 같았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높이 23미터에 둘레가 족히 8미터는 쉬이 넘던 우람한 풍채는 이제 밑동만 남았다. 지상에서 3미터 부분에 자리한 큰 가지 네 개가 원줄기 내부의 동공(洞空)으로 인해 힘을 받지 못하고 쓰러진 탓이다.
오랫동안 건재했던 이도 허망하게 쓰러지는 일이 허다하다. 믿었던 이가 배신하기도 하고 말도 안 되게 갑자기 땅이 꺼져버리기도 한다. 체력은 약해도 건강하다고 자부했던 나는, 건강검진 중 우연히 자궁에 생긴 용종을 발견해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맨 정신으로 걸어가 수술대 위에 누워 전신마취를 기다리는데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몇십 분 만에 끝난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육신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날들과 영혼만 남을 사후의 세계가 얼마나 가까운지 손끝으로 만져지는 듯했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의 안부 연락과 도움의 손길을 받으며 대략 일주일이 되어간다. 세상을 이루는 작은 사건과 큰 사고도 이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면 희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아무리 무서워도 관심을 받으면 살 수 있다.
느티나무 할아버지는 동네 주민들의 애정을 받으며 여전히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사람들은 아무도 잘린 나무를 뽑아내고 다른 나무를 심자고 말하지 않았다. 신앙이나 사상을 넘어서, 상상일지라도 신령한 힘을 가진 노거수를 보호하자고 뜻을 모았다. 보호수를 주변으로 둥글게 울타리가 쳐졌고, 잔재목은 느티나무를 기억하자는 뜻에서 다양한 설치물로 거듭나 공원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벌써 밑동 주변에 맹아(萌芽)가 태어나고 있다. 실생묘(實生苗)를 키워 복원에 힘쓰고 있다.
큰 사거리에서 살려달라 소리친 20대 여성도, 횡단보도에서 택시에 치일 뻔한 아기도 둥글게 모여서 관심을 가진 사람들 덕에 무사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이유는 개개인이 미약하고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관심과 협력은 개인을 구원하고 행복으로 이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말이다. 불완전한 육체를 둘러메고 우연과 필연으로 에워싸인 비틀거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붙잡아 주는 것은, 또 다른 불완전한 육체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 경과를 지켜보는 관심 이것이 바로 우리를 지키는 보호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