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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Oct 27. 2023

간식은 백점, 도시락은 이백 점

"너는 왜 쓰레기 도시락을 싸 오니?"

  요즘 초등학교는 체험학습 시 대절하는 버스 문제로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노란 버스에 안전벨트가 의무화되면서 일반 전세버스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첫둥이가 다니는 학교는 학기 초에 미리 예약해 두었던 전세버스를 취소했고 현장체험학습도 그렇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첫둥이는 학기 초에 이미 현장학습을 다녀온 타 학년을 부러워하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지난주, 버스 없이 걸어서 현장학습을 가기로 했다며 얼굴이 활짝 펴서 왔다.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에 초등학교가 있고, 작은 신호등 하나를 건너면 시에서 운영하는 공원과 수목원이 있는데 거기로 걸어서 간다는 것이다. 첫둥이는 선생님이 소풍 가서 신나게 뛰어놀 거라고 했다며 입이 귀에 걸렸다. 방방 뛰는 첫둥이를 보며 잘됐다고 축하해 주면서도 자연스레 생각이 이어졌다. 현장학습을 가면 엄마들 머릿속에는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고민. '도시락은 뭘 싸지?'


  첫둥이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 지 물었다.

  "도시락은 뭘 싸줄까? 맛있는 김밥 말아줄까?"


  그러자 첫둥이는 난해한 표정을 짓는다.

  "아... 엄마가 해주는 김밥 맛있기는 한데, 일요일마다 김밥 먹어서 너무 질렸어. 김밥 좀 그만 먹고 싶어."


  요즘 일요일 점심으로 계속 김밥을 먹었더니 첫둥이가 물렸나 보다. 하긴, 나도 이제 점심에 김밥을 입에 욱여넣으며 생존하기 위해 먹는 느낌이었다.

  "그럼 뭘 해줄까?"


  먹는 것에 진심인 첫둥이는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더니 갑자기 얼굴이 활짝 핀다.

  "샌드위치! 동그란 빵 안에 맛있는 거 넣은 거랑 네모난 식빵을 틀에 넣어서 구워 주는 거."


  첫둥이는 모닝빵 샌드위치와 햄치즈 파니니를 좋아한다.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김밥이나 유부초밥, 주먹밥을 싸 올 텐데 샌드위치로 괜찮겠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건강한 도시락을 싸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엄마로 보이고 싶은 마음과 그저 첫둥이가 좋아할 도시락을 싸주고 싶은 마음이 충돌한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엄마'인 척을 하면 무얼 하나. 첫둥이에게 좋은 엄마면 충분하지!


  현장학습 가는 날 아침, 첫둥이는 도시락을 싸는 내 옆에 와서 콧노래를 부른다.

  "우와! 진짜 맛있겠다. 엄마 진짜 최고야!"

  부드러운 모닝빵을 반으로 갈라 딸기잼을 바르고 양상추와 햄, 치즈를 넣는다. 호두가 들어간 잡곡 식빵은 거친 테두리를 자르고 속살에 잼과 햄, 치즈를 넣고 파니니 틀에 굽는다. 전에 쓰던 도시락 통이 작아져서 막둥이 주고 새로 산 도시락 통을 꺼냈다. 사과를 먹기 좋게 자르고 양념치킨 다리도 하나 넣는다. 간식으로 사둔 과자와 젤리, 이온 음료와 물도 담고 작은 돗자리도 챙겨준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깬 막둥이가 식탁 의자에 앉아 입을 삐죽 내민다.

"엄마, 내 거는?"


  막둥이가 자기 거는 왜 없냐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할 일은 많고 첫둥이는 춤을 추며 돌아다니는데 막둥이는 오리주둥이가 됐다.

  "나도 도시락통 새거 사줘. 나도 과자랑 젤리 줘. 나도 형아처럼 소풍 가고 싶어. 지금 바로. 오늘 갈래."


  첫둥이를 급하게 챙겨 보내고 토라져 있는 막둥이를 달랜다. 막둥이는 어린이집에서 한 달에 두 번씩 체험학습을 가는데도 당장 형아가 소풍 가는 걸 보니 부러운가 보다. 냉장고에서 사과주스와 두유를 꺼내더니 어린이집 가방에 넣는다. 젤리와 과자도 챙겨 넣고 자기도 도시락을 싸달라고 우긴다. 주말에 도시락 싸서 소풍 가자고 해도 소용이 없다. 이럴 때 꺼내는 비장의 카드는, 바로 노래다.


  막둥이를 안고 이리저리 흔들며 즉석에서 만든 노래를 부른다.

  "귀여워서 귀여워서 푸른이. 예뻐서 예뻐서 푸른이. 잘생겨서 잘생겨서 푸른이. 푸른이 엉덩이는 복숭아. 꽃동이 왕자님은 누구?"

  막둥이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손을 번쩍 든다.

  "나요! 푸른이!"


첫둥이 맞춤 도시락


  현장학습을 다녀온 첫둥이 머리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런데 표정이 좋지가 않다.

"첫둥아 잘 다녀왔어? 표정이 왜 그래?"


  첫둥이는 얼굴을 내 품에 파묻고 울먹이며 대답한다.

  "친구 몇 명이 자꾸 선생님 말씀 안 들어서 보물 찾기도 우리 반이 제일 늦게 하고, 언덕 등산도 제일 늦게 하고, 사진도 간신히 찍었어."


  땀으로 흥건한 첫둥이의 등을 토닥이며 다시 물었다.

  "그랬구나. 진짜 속상했겠다. 그 친구들은 왜 선생님 말씀을 안 들어서 우리 첫둥이 마음을 속상하게 한 거야! 보물찾기 때문에 마음이 안 좋아?"

보물찾기 한다며 흥분했던 첫둥이기에 무엇이 제일 속상했는지 알아보았다.


  "응. 선생님이 한 개씩만 찾으라고 했는데 어떤 친구는 아홉 개나 찾고, 나는 두 개 찾아서 다른 친구에게 한 개 줬는데 그 친구가 자기 두 개라며 자랑하고 다니잖아. 나는 그 친구가 없는 줄 알고 준 건데. 나는 선물도 못 받았어."

  나도 어릴 때를 떠올려보니 보물찾기 시간이 좋았고, 선물을 받을 땐 더 좋았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장난쳐서 다른 반보다 보물 찾기도 늦게 시작하고 선물도 못 받았다고 하니 얼마나 서러울까? 화제를 전환해 도시락을 잘 먹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의외의 말을 한다.


  "제일 친한 우주랑 같이 돗자리 펴고 옆에 앉아서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어. 근데 지율이가 자기 도시락 들고 자랑하면서 '도시락은 나처럼 이렇게 싸와야지 왜 패스트푸드를 싸왔니? 네 도시락 쓰레기 같아'하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가버렸어."


  친구의 도시락을 보고 '쓰레기'라는 말을 하다니. 놀라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전에도 그 친구는 첫둥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수시로 내뱉는 아이였다. 혹시 그 친구가 괴롭히는지 묻자, "지율이는 자기가 친한 여자애들 몇 명 빼고는 모두에게 그렇게 말해. 특히 남자애들한테"하고 새로운 사실을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첫둥이의 마음은 어땠는지 확인했다. 첫둥이는 내 생각보다 더 마음이 단단한 아이였다.


  "소풍은 엄청 재밌었어. 학교 다닌 지 천일 기념으로 떡도 만들어 먹고 쓰레기도 줍고 재밌게 놀았어. 도시락도 엄청 맛있었어. 백점 만점에 간식은 백점! 도시락은 엄마 사랑까지 담겨서 이백 점! 지율이가 그런 말 해도 상관 안 해. 근데 엄마가 정성스레 싸준 건데 엄마가 속상할까 봐 걱정이 됐어. 엄마는 괜찮아?"


  괜찮지 않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네가 괜찮으면 엄마도 괜찮다고 웃어넘겼지만 충격이 오래 남았다. 그 아이가 지금까지 첫둥이에게 내뱉었던 무수한 막말들이 떠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첫둥이의 새 공책을 보고 거지같이 너덜너덜하다고 말하고, 놀이터에서 놀 땐 '24시간 놀기만 하는 놀보'라며 쏘아붙이는 만 8-9세의 아이에게 치가 떨렸다. 아무래도 담임 선생님께 상담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해 핸드폰을 들었더니 첫둥이가 눈치를 채고 바로 말린다.


  "엄마 혹시 선생님한테 말하려고? 난 안 했으면 좋겠어. 걔는 원래 그런 애라서 난 신경도 안 써. 이미 선생님한테 두 번 정도 혼난 거 봤어. 근데 여전히 똑같아. 난 걔랑 엮이는 게 더 싫어."


  선생님께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첫둥이의 말에 참았다. 첫둥이가 파헤쳐갈 사회생활이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야 이 아이의 곁에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막둥이의 현장학습 간식 도시락. 초코도넛과 배



  '지율'이를 생각하며 성숙하고 따뜻한 에세이를 많이 남긴 소설가 박완서의 산문 <집 없는 아이>가 떠올랐다. 선물을 사러 오랜만에 들린 백화점에서 예의 없는 아이들을 보고 제대로 된 집이 없는 아이일 거라 추측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건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대화가 있고, 자유와 구속이 적당히 조화된 가정으로서의 집이었다. (... 중략...)     

  남부럽지 않게 거두어주는 집은 있을지 모르지만 타인과 제대로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가족이 있는 집은 없는 아이처럼 보였고, 괜히 백화점 안을 쏘다니는 소년 소녀들의 태반이 완전한 집은 못 가진 아이들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생각도 들었다."


  지율이도 어쩌면 집이 없는 아이가 아닐까? 첫둥이 말로는 그 아이가 부잣집 외동아이라고 소문이 났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대화가 있고, 자유와 구속이 적당히 조화된 가정으로서의 집'은 없을지 모른다. 다른 아이들의 물건이나 음식이 '쓰레기'처럼 보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는 그 아이의 가슴속에 충분한 사랑이 심겨있지 않다면 박완서 선생님의 말대로 그 아이는 집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 아이가 측은해졌다. 무슨 말을 듣고 자라야 일반적인 아이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모멸감 가득한 말을 쏟아낼 수 있는 것일까. 그 아이는 아직 어리고 그 아이 곁에 충분한 사랑의 빛이 내리쬔다면 아이는 변화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주는 가슴과 이유 없는 평안함이 가득한 숨결 속에 자란 아이들은 타인도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다. 내 아이가 귀중한 것처럼 그 아이도 소중하고, 그 아이가 중요한 것처럼 내 아이도 특별하다. 한 아이를 지키는 보호자인 동시에 지구별에 작은 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어린아이들을 넉넉한 가슴으로 품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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