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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Oct 11. 2024

미니멀리즘도 맥시멀리즘도 아닌, 아이 키우는 집

아이들의 작품과 짐이 넘쳐나는 집안 사정

  "치우면 뭐 하나. 어차피 또 어지를 건데."


집안 대청소를 할 때마다 남편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아이들은 치우기 무섭게 어지르고 늘어놓는다. 놀고 나면 치우기로 약속하지만 문제는 현재진행형인 놀이가 많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한 가지를 다 놀고 또 다른 놀이를 하는 게 아니다. 이 놀이를 하면서 다른 놀이와 연계하거나 확장해서 놀이판을 키워간다. 다 놀았으면 치우라고 하지만 그때마다 아이들은 대답한다.

  "아직 놀고 있는 중이야."

아직 놀고 있는 중


  아이들은 놀 때마다 온 집안의 물건들을 적극 활용한다. 특히 집 짓는 놀이를 좋아해서 의자, 이불, 책 등 온갖 장신구들을 가져다 움막들을 지어댄다. 그러면 그 방은 움막으로 꽉 차서 발 디딜 틈이 없게 되고 한번 만든 걸 부실 때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 때문에 아무리 불법 건축물이어도 철거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치울 수밖에! 아이들에게 치우라고 하면 결국 물건의 자리 이동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없는 낮 시간에 조용히 50리터 쓰레기 봉지를 사다가 아이들 몰래 한 번씩 싹 갖다 버린다. 커다란 쓰레기봉투, 재활용 박스, 기부 물품을 담을 상자, 누군가에게 물려줄 물건, 중고 거래로 팔 물건 등을 나눠서 정리하다 보면 아이들이 집에 올 시간이 번개처럼 찾아온다. 그럼 재빨리 아이들의 눈을 피해 구석구석 숨겨둔다. 그러다 숨바꼭질하다가 쓰레기 봉지를 발견한 아이는 입이 댓 발 나온다. 10살 첫째는 이제 눈치가 빤해서 쓰레기봉투에 들어가면 버린다는 걸 알고 또다시 나 몰래 물건들을 빼간다. 5살 둘째는 "엄마 이거 버리는 거 아니고, 정리하려고 둔 거지?" 하며 내 말을 철석같이 믿고 희망찬 눈빛으로 바라본다.


  문제는 아이들의 작품이다. 작은 손으로 꼼지락대면서 온 마음을 다해 그리고 만들고 환희에 차서 집에 모아둔 그 작품들! 아이들 눈에는 진귀한 보물이고 부모 눈에도 대견한 작품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엉성한 간격이 벌어지고 무너지고 빛이 바래면서 발에 치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그런 작품이 너무 많다 보니 다 보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일정기간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하고 보관이 어려운 물건은 조용히 처리한다.

우리 집 작품 전시회


  매일 정리를 해도 더 많이 늘어놓는 아이들의 부지런한 손길은 따라잡을 수가 없다. 아이들이 없을 때 아무리 처분하고 정리해도 아이들의 복귀와 함께 집은 봉황당 제사상이 된다.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첫째의 옷을 새로 사주고, 책장의 책들도 갈아엎어주다 보면 둘째에게 물려줄 것들이 상당히 쌓인다. 창고가 딸린 대형 집도 아니고 평범한 아파트에 사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둘째를 위해 남겨둘 것인가, 그냥 처분할 것인가?


  요즘엔 중고거래가 워낙 손쉽고 활발하게 이루어지다 보니 처분을 택한다. 첫째가 좋아했던 분야를 둘째도 좋아할지 미지수이고, 다섯 살 터울이나 나기 때문에 책이든 옷이든 너무 낡게 된다. 아깝지만 과감하게 처분하지 않으면 집에 사람이 사는 게 아니고 짐이 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추억은 사진과 기억 속에 남겨두고 물건은 떠나보낸다. 필요한 곳에서 훨씬 더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이렇게 버리고 처분하고 물려주고 기부해도 여전히 집은 난장판이다. 한때는 아무리 치워도 넘쳐나는 장난감과 옷가지, 아이들의 작품 등으로 우울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집안 꼴이 꼭 내 정신을 말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어느 정도 아이들이 더 클 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게 내 생각보다 훨씬 과하더라도 말이다.


  내 바람 같아서는 집안을 확 밀어버리고 발에 걸리는 게 없어 로봇청소기가 맘껏 돌아다니는 미니멀리즘 집을 만들고 싶지만 아직은 어림도 없다. 아이들이 부모 품을 떠나 독립된 생활을 하면 몰라도 지금은 아이들이 행복한 집이 먼저기 때문이다. 적당히 어지르고 짐이 흘러나와도 아이들이 즐거운 게 우선이다. 아이들에겐 보금자리 아지트 같은 공간이 필요하고 숨을 곳도 있어야 하며 가슴이 벅차서 이것저것 꺼내와 놀이로 확장하는 시간도 중요하다. 나는 아이들이 아이답게 다양한 놀이를 만들어 내고 재밌게 즐기는 모습이 기쁘다. 인터넷 게임 말고도 몸으로, 손으로 할 수 있는 놀이가 많다는 걸 지금 이 시기에 충분히 누리기를 바란다.

말은 잘 못 놓지만 재밌게 윷놀이 중


  어쩔 땐 남편과 내가 앉을 곳조차 없어 이 방 저 방을 헤매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어지르며 노는 모습도 귀엽고 소중하다. 욕조에 물을 받아 띄운다며 온갖 재활용품들을 얼기설기 이어 붙여 다양한 배를 만들곤 젖을 까봐 아까워서 띄우지 못하거나, 포켓몬 카드에 그려진 포켓몬들의 능력치를 진지하게 외우며 배틀하거나, 밖에서 주워온 파란색 비비탄 총알을 소중하게 손에 감싸 쥐고 와서 나에게 선물이라고 내밀거나, 딱지치기에 빠져서 대형 부직포로 방석보다 더 큰 딱지를 접거나, 내 생일 선물이라며 종이로 커다란 장총을 만들어 주거나, 누가 더 센지 대결한다며 거실 가득 장난감 자동차와 뱀이나 상어 같은 인형들을 가득 채워두는 모습도 지금 아니면 언제 보겠나 싶다.


  그러니 매일은 말고 가끔의 대청소가 필요하다. 실컷 놀고 지겨울 때, 새로운 관심사로 옮겨가며 지나간 추억들을 정리한다. 짐 때문에 집이 좁아지고 가끔은 저절로 한숨이 나와도 어쩌겠는가. 아이들이 행복하다는데. 정리할 건 정리하지만 아이들의 마음까지 사라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손을 댄다. 특별히 첫째가 좋아하는 책들을 정리할 때 허락을 받고 처분하고, 이후 좋아할 만 책들을 고심해서 다시 채워주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온다. 내가 사는 동네는 도서관에서 1인당 10권의 책을 빌릴 수 있어서 한 번씩 카트를 끌고 가서 40권의 책을 빌려오고 반납한다. 아이들의 관심사와 성장에 맞춰 책을 뒤지고 고르다 보면 품과 시간이 많이 들고, 책이 무겁기도 하지만 빌려올 때마다 환호하는 아이들의 모습 때문에 안 갈 수가 없다.


  우리는 미니멀리즘도, 맥시멀리즘도 아니면서 적당히 뒤엉켜 지내는 보통의 아이 키우는 집이다. 처분한 게 티도 안 날 만큼 금세 채워지고, 누군가 집에 온다고 하면 정리하는 것부터 걱정이지만 아이들 키우는 집이 다 그렇지 않겠는가. 타인의 시선보다는, 아이들이 집에 오면 알 수 없는 평안함에 휩싸여 모든 걱정 근심을 내려놓고 진정한 자기다움 속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언젠가 내가 치우면 그냥 그대로 아무도 안 어지르는 날이 오면 그건 그대로 씁쓸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도 아이들의 작품과 짐이 넘쳐나는 이 시기를, 적당히 치우며 함께 누려야겠다.

아슬아슬 화장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종이컵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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