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복잡한 날의 힐링 포인트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에 동물 농장이 있다. 누군가 보면 우습다고 할지 몰라도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힐링 포인트가 되었던 장소이다. 초등학교 4, 5학년 즈음 메고 다니던 가방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고모가 사주셨던 보라색 책가방과 손가방이었다. 단단한 재질에 바탕은 보라색이었고 드문드문 노란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귀여운 가방이었다. 처음 그 가방을 받았을 땐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입학 전부터 매일 그 가방을 메고 돌아다녔다. 일곱 살의 나는 자체 패션쇼를 좋아했는데 꼭 마당으로 나가, 작게 집 주위를 한두 바퀴 돌았다. 엄마가 새로 사주신 고양이 캐릭터 잠옷이나 달걀처럼 위는 하얀색, 아래는 노란색에 하얀색 비즈가 박힌 원피스를 입고 노래까지 불렀다. 거기에 보라색 가방까지 추가되어 심장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소중했던 가방이 어느덧 창피해진 것이다. 친구들처럼 단순히 검정 가방을 메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께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야기였고 ‘멀쩡한’ 가방을 놔두고 왜 새로 사냐며 그냥 쓰라고 하셨다. 치기 어린 마음에 그 말이 너무 섭섭하고 속상해서 집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라지면 얼마나 날 찾고 가방을 사주지 않은 걸 후회하실까 생각했다. 다만 어디로 나가야 할지 몰라 동물 농장으로 갔다. 숨탄것들 옆에 숨어서 부모님이 나를 찾기를 기다렸다. 종이가방에 옷가지 몇 개를 챙겨서 소 구유에도 누워보고 개집 옆에도 쪼그려 앉아 보았는데 부모님의 웃음소리만 들릴 뿐 나를 적극적으로 찾는 소리가 안 들렸다. 결국 해거름이 지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나비 눈을 뜨고서 제 발로 집으로 들어갔다. 결국 부모님 손바닥 안이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산에 있는 동물 농장에는 소, 염소, 닭, 돼지가 있다. 편하게 동물 농장이라 부르고는 있지만 사실은 조금씩 마당에서 키우는 수준이다. 그중에서 닭은 여러 마리인데 그냥 ‘닭’이라는 대명사로는 퉁 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종이 섞여 있다.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갈색의 토종닭, 뼈가 부리까지 까맣고 두꺼운 오골계, 그보다 작고 날갯짓을 더 잘하는 청계다. 자세히 보면 소나 염소, 개나 고양이처럼 닭도 다 다른 기질과 외모를 지녔다. 전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 토종 수탉 아래 둥지 주위를 맴도는 침묵파 토종닭, 날아서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실세파 오골계, 모래찜질을 좋아하고 수풀 속에 숨어 다니는 미모파 청계의 삼국시대다. 달걀은 같은 곳에 낳다 보니 어미 닭이 세 종류의 병아리를 끌고 다니기도 한다. 달걀도 먹어보면 어찌나 튼실한지 달걀노른자가 프라이팬 위에서도 잘 터지지 않고 탱글하고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한다. 이 세 지파의 지형 변화와 기류를 파악하다 보면 그간 밀렸던 근심이나 걱정은 다 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쳐다보게 된다. 흥미로운 영화에 빠져들 듯, 맛있는 음식에 행복감을 느끼듯 새로운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일반적으로 양계장의 닭은 28일에서 길면 30일 사이에 출하된다고 한다. 식탁에 오르는 닭은 대부분 태어난 지 한 달 된 것들이다. 우리 동물 농장의 닭은 자유롭게 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한 달이 아니라 이미 태어난 지 몇 년이 되었다. 그간 우두머리를 향한 수탉들의 목숨을 건 분쟁이 잦다 보니 수탉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암탉들이 대부분인데 나이가 들어서 인지 이제 달걀을 잘 낳지 않는다. 시골에 갈 때마다 한두 판씩 받아오던 귀한 달걀을 받지 못하니 아쉬움이 크다. 엄마와 상의한 끝에 새로운 닭을 유입하기로 했다. 동네 지인처럼 부화기를 돌리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마트에서 산 유정란을 부화기에 넣어봤는데 아홉 알 중 한 마리가 부화했다. 다음에는 시골에서 가져온 알을 넣었더니 모두 실패했다. 더 이상 유정란이 아니거나 갖고 올라오는 길에 충격이 가해진 게 아닐까 추측했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양계장에서 부화용 종란을 구입했다. 이제는 구입한 부화기가 아까워서 뭐라도 부화시키고 싶었다. 달걀은 평균적으로 21일이 지나면 부화하는데 19일경부터 한두 마리씩 알을 깨고 나오기 시작했다. 열 알 중 열 마리가 모두 부화에 성공했다. 병아리는 보통 두 번 태어난다고 말한다. 달걀로 태어났을 때 한번, 알을 깨고 나올 때 한 번이다. 그만큼 알을 깨고 나오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고통도 상당하다. 한 마리 한 마리 알을 부리로 쪼아 발로 껍질을 차고 나오는데 그 경이로움에 박수가 절로 나온다. 그렇게 탄생한 하얀 털을 가진 오골계, 백봉 오골계가 지금 내 옆에 있다. 이제 일주일이 되었는데 털이 마르기가 무섭게 날개가 생기고 꽁지깃이 올라오고 있다. 뭐든 부리로 쪼아대면서 궁금해하고 푸드덕 거리며 제법 날아오르기도 한다. 먹이가 있고 온도만 맞으면 병아리는 울지 않기에 소음은 없다. 다만 냄새가 제법 나서 매일 두 번씩 육추기를 청소하는데도 병아리 배설물 앞에 말짱 도루묵이다. 곧 시골로 내려가서 다행이지 아파트에서 병아리를 키운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 고민하는 일이 생겼다. 예전처럼 동물 농장으로 달려갈 수 없기에 다른 방식으로 고난을 씹어 넘길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마음이 번잡한 날엔 혼자 생각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내겐 어려운 일이지만, 가슴이 꽉 막힐 때면 일부러 밖에 나가 바람을 쐬고 온다. 발밑을 보지 않고 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내다보고 새로운 관찰을 해보려 애쓴다. 따뜻한 커피나 달콤한 주전부리 생각도 나지만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한 번 더 참아본다. 찬바람에 발끝과 귓속이 쨍해져 올 때쯤 집으로 들어와 병아리를 본다. 작은 소리에도 흠칫 놀라고 추울 땐 전구 앞으로, 더울 땐 그늘로 들어가는 모습을 살핀다. 모이는 적당한지, 물은 깨끗한지, 체구는 얼마나 커졌는지 성별은 어떨지 요모조모 들여다보노라면 시간이 훌쩍 흘러 있다. 쪼그려 앉아 다리는 저리고 올려놓은 찻물은 끓어오른다. 고민은 붙잡을수록 부피가 커진다. 생각이 너무 깊어지면 먼지처럼 작은 일도 내 시야를 온통 차지해 제대로 볼 수가 없어진다. 고민이 너무 깊어질 땐, 생각을 그만 멈추어야 한다. 지금은 거인의 날개처럼 보이는 일도 언젠가는 보라색 가방을 검은색 가방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별일 아닌 게 될 수도 있다. 내가 하는 고민은 이미 누군가는 해봤던 일이고, 끝까지 해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신토마스주의의 대표자이자 프랑스의 철학자인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는 『공부하는 삶』에서 “우리는 내적 자유를 통해서만 무언가와 합일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걱정을 하든 안 하든, 직진이든 멈춤이든 어떤 버튼을 누르든지 나에게 자유와 평안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결정했다면 털어버리자, 이 세상에는 다른 즐거운 일이 얼마든지 많다. 까만 눈의 병아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게 삐약 소리를 낸다. 번민이 아니라 마음을 간질이는 일들을 생각하며 기지개를 켜야겠다.
2022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