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엔 한 번쯤은 젖어봐야지, 비도 감정도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의외로 덜 더웠다. 흐린 하늘아래 바람까지 불어오니, 선글라스도 양산도 쓸 일이 없었다. 오늘 아침으로 굴을 넣어 시원하다는 무이굴국수. 일찍 가서인지 내가 첫 손님이었다. 하얀 쌀국수 위에 굴과 담백하게 볶은 쇠고기가 소복이 얹혀 있었다. 술도 안 마셨는데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베트남 여행 때처럼, 이번에도 룸메이드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메모를 남겼다. 중국어 번역기를 돌려 그림 그리듯 메모지에 썼다.
-머무는 동안 편안한 서비스 해주어서 고마워요.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요.
삼일 동안 편안했던 객실에 가벼운 아쉬움을 남기고 문을 나섰다.
마지막 목적지는 타이파 빌리지다.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주머니에 짤랑거리는 1 mop(마카오 화폐단위) 짜리 동전 6개. 그러나 이번에도 기다리는 버스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연신 길 끝을 바라보며, 혹시 정류장을 잘 못 찾아온 건 아닌지 긴장이 되었다. 내 조급함이 너무 앞섰나보다. 버스가 오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 제법 굵은 빗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럼 그렇지. 여행이 순조롭기만 기대하다니. 사선으로 흐르는 창밖의 빗물과 함께, 내가 묵었던 호텔, 세나도 광장, 에그타르트 집, 구경만 했던 카지노 호텔 등 지난 이틀 동안 내가 걸었던 길들이 흘러갔다.
감상에 오래 머무를 여유는 없었다. 어제처럼 멍하게 있다가 정류장을 지나치면 곤란하다. 이제 현금도 버스비와 LRT 탈 비용정도 남겨 놓은 상태였다. 예상과 다른 상황이 되면 곤란해진다는 생각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버스의 와이퍼는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류장에 내려 서자, 아예 장대비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건물 처마 밑이나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우산이 있긴 했지만 나도 백팩을 멘 채로 한참 서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혹시 그칠지도 모르니. 하지만 진한 회색빛의 하늘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대로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국 우산을 펴고 성큼 나서 골목으로 향했다. 비에 젖어 더 짙어진 초록의 나무도 파스텔톤의 건물도 더 선명하게 보였다. 특유의 골목 풍경이 돌아서는 곳마다 툭툭 나타났다.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우산 너머로 커다란 백팩이 무방비로 젖고 있었다. 운동화는 축축했고, 양말도 이미 흥건했다. 휴대폰에도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닌가. 이런 날도 결국 추억이겠지.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작은 가게들은 이미 사람들이 가득찼다. 근처에 맥도널드가 있었다. 여기도 많은 사람들이 비를 피해 들어와 있었다. 간신히 비어있는 한 자리에 백팩을 내려놓고 키오스크 앞에 섰다. 죄다 모르는 중국어. 눈치껏 눌러 햄버거 세트는 간신히 선택했는데, 문제는 결제였다. 뒷사람은 기다리고 있고 급히 번역기로 확인해 봐도 모르겠다. 결국 직원을 불렀다.
“결제하고 싶은데 알리페이로 가능할까요? “
직원은 친절하게 버튼을 눌러주었고 외국인인 나를 배려해서 자리까지 가져다주는 서비스를 선택해주었다.
익숙한 맛이다. 첫날 콘서트가 끝나고 먹은 첫 끼도 햄버거였는데, 마지막 식사를 될 것 같은 지금도 햄버거로 마무리하는구나. 비 오는 날, 낯선 도시 한편에서 이걸 먹고 있으니 마치 우리 집 근처의 맥도널드에 온 것 같이 편했다. 낯섦 사이에 익숙함도 필요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공항에 갈 시간. 마카오 경전철인 LRT를 타보기로 했다. 근처 Pai Kok 역이 그리 멀지 않았다. 또 키오스크 앞. 또 한 바닥 가득한 한자들. 결국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8 mop. 마지막 남은 5 mop짜리 동전 2개를 넣으니 파란색 플라스틱 코인이 나왔다. 들어갈 때는 찍고, 나올 때 내라고 했다. 직원은 친절하게 타야 할 곳도 알려주었다.
승강장에 도착하니 마치 우리나라의 경전철 같았다. 1량짜리 귀여운 전철이 반대편으로 지나갔다. 비는 지붕이 있음에도 분무기로 뿜어져 나와 안개처럼 모든 곳을 덮었다. 비만 아니었으면 주변 풍경을 보면서 여유 있게 갈 텐데 도통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도 맨 앞칸에 자리를 잡고, 열차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공항역 도착. 같이 내리는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가니 공항이다. 체크인과 소지품 검사, 출국심사까지 별문제 없이 통과됐다. 남은 시간,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았다. 서늘한 실내와 빗물에 젖은 옷으로 따뜻한 라테 한 잔이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9천 원이 넘는 가격이 조금 아쉬웠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마무리할 공간이 필요했다.
지난 3일 동안, 마카오에서 온갖 날씨와 감정을 겪었다. 따가울 정도의 햇빛, 흐림, 폭우, 그리고 번개까지. 혼란과 당황, 불안, 설렘, 즐거움과 기쁨, 충만함과 안도감, 만족과 효능감까지. 이 도시는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었고 그 안에서 그동안 잊었던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계획보다 조금 헤매고 늦었지만, 하고 싶은 것들을 천천히 해냈다. 아주 소소하고 작은 도전들의 연속이었던 시간들이었다. 딸아이의 여행처럼 관광지나 맛집을 많이 돌아다니지는 못했지만 대신 오래 천천히 걷고, 주변을 관찰하고, 드로잉도 하고, 내 속도대로 나를 편안히 두었다.
30분 뒤면, 다시 내 나라로 간다. 좋은 기억을 품고 돌아간다는 건, 조금의 아쉬움과 함께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게이트를 통과해 비행기에 오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