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붙여 놓을까요?

농사룰 모르는 자의 최후

by 케이론

​시골에서 자랐지만 농사엔 완전 문외한이다. 아빠는 직장에 다니셨고, 엄마도 작은 텃밭을 가꾸셨지만 나에게 밭일을 시키신 적이 없었다. 농사를 지으셨던 시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산세베리아나 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내가 농사를 짓게 될 줄이야.

학교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아이들이 작물을 심고 자라는 과정을 관찰하며, 열매가 달리면 따서 집에 가져가기도 했다. 나는 농사는 몰랐지만 교장선생님과 다른 분들이 대부분 돌보셨고, 아이들과 하는 소소한 활동 정도는 거들 수 있었다.

그 해, 교장선생님은 학교농장 예산을 받아 텃밭을 대폭 확장하셨다. 연못까지 만들어 연꽃을 심으시고, 방울토마토, 고추, 상추, 쑥갓, 오이, 옥수수, 이름 모를 쌈채소들까지. 아니 참외와 수박, 벼, 포도까지, 그야말로 ‘학교판 식물농장’이 되었다. 여름이 오자 초록이 뒤덮고, 덩굴들이 얽혀 밭고랑으로 들어가기조차 쉽지 않았다.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부탁을 하셨다.

“정선생님, 허수아비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혹시 하나 만들어줄 수 있어요?”

나는 흔쾌히 맡았다. 학교 기사님께서 각목으로 뼈대를 만들어 주셨고, 아이들이 쓰다 버린 담요를 집에서 가져와 잘라서 머리와 몸을 만들었다. 남편의 헌 러닝셔츠로 얼굴을 감싸고 표정을 그렸더니 제법 사람 꼴이 나왔다. 유치원 선생님이 커다란 인형눈알을, 기사님은 넓적한 장갑을 내주셨다. 작아서 안 입는 아이 옷도 입혔다. 그렇게 허수아비 남매가 완성되었다.

풍성한 작물에 허수아비까지, 학교 밭은 구색이 딱 맞았다. 교장선생님은 매일 밭을 돌보며 잡초를 뽑고, 친환경 약을 뿌리고, 오시는 손님들에게 자랑하곤 하셨다.

어느 날, 교육청 장학사님이 텃밭을 보러 내일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출장을 나가시던 교장선생님께서 내게 부탁을 하셨다.

“정선생님, 애들이랑 고추밭에서 익은 것들 좀 따주시겠어요?”

“네, 그럴게요.”

점심시간, 아이들과 고추밭에 갔다. 한창 여름의 열기를 먹은 고추들은 햇살에 반짝이며 쑥쑥 자라 있었다. 아이들은 신나서 따기 시작했고, 나는 기사님께 포대 두 개를 얻어 열심히 아이들과 열심히 채웠다. 네 이랑의 고추밭이 금세 텅 비었다. 이제 남은 건 몽당연필 같은 작은 고추들뿐이었다. 수확물 포대를 행정실에 맡기고, 우리는 뿌듯한 마음으로 교실로 올라왔다.

5교시를 마칠 무렵, 인터폰이 울렸다.

“정선생님!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고추를 다 땄어요?”

“네, 말씀하신 대로 잘 익은 거 다 땄어요.”

전화기 너머 들려온 교장선생님의 탄식.

“아이고!”

수업이 끝나고 급히 내려가 보니 교장선생님이 텃밭 앞에서 허탈한 얼굴로 서 계셨다.

“무슨 일이세요, 교장선생님?”

“정선생님, 익은 고추만 따 달라고 했잖아요.”

“네, 말씀하신 대로 익은 거 다 땄는데요.”

“익은 거, 그게 빨간 거만 따라는 거였어요. 말리려고 한 건데…”

그제야 알았다. ‘익은 것’이 꼭 ‘다 큰 것’은 아니라는 걸. 익은 게 빨간 거였다니. 그저 먹을 정도로 다 자란 파란 고추도 다 익은 줄 알고 아이들과 신나게 다 땄는데.

“아이고, 내일 장학사님 오시면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저는 먹을 만큼 큰 것들 다 따라는 줄 알고…”

“에휴… 어쩔 수 없지요.”

한숨만 내쉬는 교장선생님을 보며 너무 죄송스러워 엉뚱하게 물었다.

“저.. 이쑤시개로라도 다시 붙여 놓을까요?”

그날 교장선생님은 나한테 화도 내지 못하시고 얼굴만 울그락불그락하셨다. 결국 다음 날 장학사님은 고추 하나 없는 고추밭을 보셨다. 교장선생님은 뭐라고 설명하셨을까.

지나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무엇이 익은 것인지’를 조금 더 생각하게 되었다. 어른이 되었다고 다 어른이 아니듯이. 사람도, 고추도, 때가 되면 저절로 빨갛게 익는 법이다.

이후 다른 학교에 가서 학교 텃밭을 학급별로 가꾸라고 주실 때마다 미리 이야기한다.

“전 시골에서 자랐지만 농알못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