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생 만나이법 폐지로 올해로 <마흔하고도 하나>, 마음 나이는 어린왕자_핑거래빗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_지금 시작합니다. 개.봉.박.두!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내 위로 언니가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 가난해서 아기가 아파도 병원에 쉽게 데려갈 수 없었고 아기가 걷기도 전에 요즘말로는 '영아돌연사'로 하늘나라로 갔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할머니 살아 생전에 들었다.
"참 예뻤는데..."
엄마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 나는 묻고 싶은게 있어도 묻지 못했다. 아마 엄마는 지금도 가끔 그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너지겠지. 아니면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서 그런 감정마져도 흐릿해졌을까.
"피부도 까무잡잡한게 건강해 보였어. 토실토실한게..."
할머니가 내가 태어났을때 모습을 기억하고 하신 말씀이었다. 나는 아기때부터 건강하게 태어나 먹성도 좋았다고 한다. 기억 나지 않는 대부분의 시절은 모두 할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내가 <세살이 되었을 무렵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세살쯤 됐나...그때 당시에 애기들이 먹는 영양제가 있었어...원비라고...근데 우리 공주(할머니가 나를 부르던 애칭)가 그걸 냉장고에서 하나꺼내 몰래 훔쳐먹고는 바닥에 코를 박고 누워서 꺄르르 웃는 거야.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알고도 모른척 해줬지...하하하"
할머니는 첫 손녀가 너무 예뻐서 사진관에서 <사진기>를 빌려와(그 시절엔 사진기 하나조차 집에 없었다.) 사진을 찍어주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대여섯살 때까지의 사진이 있다. 아기때 사진을 보면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게 한눈에 보인다. 우리 가족은 대가족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삼촌들까지 함께 살았다. 엄마는 도련님들 도시락까지 싸야했고, 시부모님까지 모셔야 했으니 갓 스무살된 나이에 시집와 얼마나 고단했을까. 생각만해도 난 엄마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으로 따지면 애기였을 나이다.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나는 두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어서 어려서 항상 동생과 뛰어 놀았다. 동생은 조용했던 나와는 다르게 개구지고 장난꾸러기였다. 늘 나를 놀려서 쥐어박히곤 했다. 어떤 사진에서는 동생이 울면서 손들고 있고 내가 부지깽인지 막대기를 들고 호위하는 모습도 있었다. 아마도 내가 어렸을때 조용함 속에 그런 모습도 숨어있었던 것 같다. 7살때 동생과 찍은 사진을 보면 세상 해맑게 웃고 있다. 나는 왜 그때의 그런 해맑은 웃음을 잃었을까. 커가면서 그렇게 웃어본 기억이 없다. 웃을 일이 없는 걸까.
내가 <7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회사에 취직을 했고, 나는 자연스레 학교에 딸려 있는 병설유치원에 입학했다. 그때 당시 사진을 보니 아마도 유치원에 들어가기 싫었던 것 같다. 잔뜩 찌푸린 사진이다. 유치원 시절을 회고해 보면 나는 조용하고 겁이 많았다. 또래 남자아이가 한번은 짖궂은 장난을 치면서 교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난 우는거 조차 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서 교실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서 선생님께서 집에 빨리 안가면 도깨비가 나올 거라는 말에 겁이나 집에 쏜살같이 가곤 했던게 기억이 난다.
내가 <9살>이 되었을 때는 동생이 입학을 해서 동생 손을 잡고 학교에 다녔다. 장난꾸러기라서 항상 옷을 잡아당겨서 데리고 다녀야 해서 조금 성가셨다. 그래도 혼자서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는 동생과 다녀서 덜 외로웠다. 나는 수학에 자신이 없어서 자주 나머지 공부를 했고, 집에 돌아갈 때면 선생님께서 사물함에서 꺼내 먹으라던 호빵이 너무 맛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호빵을 엄청 좋아한다. 먹을거 귀하던 시절에 선생님께서 주신 호빵이 얼마나 맛났던지 나에게 호빵은 추억의 음식이다. 나는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가사를 써서 혼자 콧노래를 부르거나 그림 그리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운동도 잘하지 못해서 체육 시간이면 늘 배가 아팠다. 혼자서 걸으며 공상을 한다거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만화를 보는게 취미였다. 내가 본 만화는 주로 빨강머리앤과 비밀의 화원, 베르사유의 장미, 은비까비의 옛날 옛적에와 날아라 슈퍼보드, 영심이, 달려라 하니, 나디야, 키다리 아저씨 등이다. 나는 만화속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만화가 나올 시간이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누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모를 정도로 텔레버전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방과 후에는 마을 친구들과 산과 들로 쏘다녔다. 우리만의 기지를 짓는다며 땅을 파며 놀기도 하고 산에 올라가 작은 아궁이를 만들어서 불을 지피고, 국수를 끓여 먹기도 했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참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산집>_어렸을때 삼촌이 산에 집을 짓고 거기서 공부를 하며 생활했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방학때면 김치와 밥으로 도시락을 싸서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나는 그 산집이 너무 좋았다. 산집에 가면 할머니는 늘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데, 아궁이에서 타던 솔잎 냄새가 나는 너무 좋았다. 지금도 가끔 밖에서 나무 장작 타는 냄새나 불냄새를 맡을 때면 그 불냄새가 나는 너무 좋다. 할머니는 그러고 나면 샘물로 가서 바위위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편 다음 우리와 함께 먹었다. 반찬이라곤 양념도 많이 안묻은 신김치와 흰밥 뿐이었는데도 시원한 나무 그늘아래 샘물가 옆에서 먹으니 꿀맛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곳이 그리운데, 이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꿈꾸면 갈 수 있을까. 삼촌은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하늘 나라로 갔다. 삶이 너무 괴로웠는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그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국민학교 시절(내가 졸업한 후에 명칭이 바뀌었다.) 나는 글쓰는 걸 좋아해서 대회에 나가기도 했고, 독서동아리에 참여하기도 했다. 성적은 늘 <미양가> 였다. 그래서 엄마 아빠에게는 늘 영특하고 운동도 공부도 잘하는 남동생과 내가 비교대상이었다. 그때 아마도 내 열등감과 자존감이 낮아진건지도 모르겠다. 그걸 회복하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란 존재가 무얼 잘해야만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지 늘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늘 사랑을 갈구하고 애정결핍이 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빠는 나에게 기대치가 높았다.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다 잘 되길 바랐다. 그도 그런 것이 아빠는 정말 똑똑했고, 출세나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강했으나 집이 너무 가난했고, 장남의 자리를 지키느라 중학교 졸업도 못한 채 할아버지를 도와 농삿일을 했다. 아빠는 술에 취할 때면 중학교때 다른 친구들이 학교 가면서 혹시라도 자기를 볼까봐 숨어 있었다는 얘기를 종종 하곤 했다. 어려서는 그 말들이 푸념같고, 듣는 것도 귀찮다 생각했는데, 아빠의 삶은 얼마나 고단하고 분노로 가득찼을까.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거다. 오직 가족을 위해서만...그래서 아빠는 나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줬다. 그런데 나는 아빠의 기대에 반에 반도 미치지 못한 것 같다. 그게 많이 죄송하다. 나의 자존감 극복은 아마도 이런 여러 정황에 대한 깨달음이 온데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대치가 높다는 건 아마도 그 사람을 엄청 사랑하기에 그 사람이 좀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지금 가진게 많지도 사회적 출세를 하지도 못했다. 12년전부터 나에게 찾아온 공황장애를 죽을 힘을 다해서 이겨내면서 내 마음을 돌보는 것 말고는 힘을 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12년만에 내가 깨달은 것은 스스로의 행복이 출세나 돈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필요한 만큼의 돈은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을 초월한 사람처럼 '돈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건 사실 거짓말 같은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괴롭히는 걸 즐거움으로 삼는 친구 두명이 있었다.> 그 애들은 나를 교실에 가두기까지 했다. 동물원에 갇혀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동물이 된 심정이었다. 나는 그애들이 너무 싫었고, 학교에 가려면 늘 배가 아팠다. 엄만 내가 왜 아픈지 몰랐고, 환으로 된 민트향같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소화제를 내밀곤 했다. 하지만 삼촌은 달랐다. 삼촌은 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문방구에 가서 커다란 물고기 사탕이나 신기한 모양의 사탕을 사주고는 했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걸 먹으면 아픈걸 잊었다. 몸이 아픈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그런 삼촌이 너무 좋았다. 지금도 곁에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삼촌이 너무 그립다.
<나는 이따금 초저녁에 저녁도 먹지 못하고 졸려서 잠들어 버린 적이 있다.> 새벽이었는지 몇시였는지는 모르지만 깨서 배가 고프다고 하면 엄마는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양은냄비에 안성탕면을 끓여왔다. 가스레인지도 없던 시절 연탄으로된(?) 곤로로 밥을 했는데, 그 새벽에 일어나 라면을 끓인다는 건 정말 자식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지금도 안성탕면 라면봉지를 볼 때면 그때 생각이 나곤 한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엄마가 해주던 음식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엄마는 이따금 감자 고추장 찌개를 끓였다. 그때 나는 고추장찌개가 너무 매워서 감자 고추장 찌개와 저녁을 먹은 날이면 머리가 멍할 정도로 정신을 못차렸다. 그런데도 엄마의 감자 고추장 찌개는 정말 맛있었다. 엄마는 두부를 가마솥에 손수 만든 적도 있었는데, 그 두부맛은 마트에서 사는 두부와 비견될 수 있는 맛이 아니었다. 콩물을 끓이고, 간수로 굳히고 틀에 넣어 두부가 될 때까지 그 정성이 있어 두부가 더 맛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종종 주말에 진미춘장을 사다가 짜장밥을 해주었다. 춘장과 야채 그리고 고기의 분량이 절묘해서 정말 맛있었다. 그 외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엄마의 소풍도시락이다. 엄마의 김밥 재료에는 햄과 소세지, 맛살과 시금치 그리고 단무지가 들어갔다. 가장 맛있었던 건 꼬다리 김밥이었다. 소풍날 아침에는 항상 꼬다리 김밥을 먹었다. 게다가 소풍 가방에는 평소에는 구경도 하기 힘든 간식들이 진짜 거짓말 보태지 않고 가방이 터질듯이 담겨있었다. 아마도 엄마는 평소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사줄 수 없는 간식들이니 소풍때 만큼이라도 실컷 먹게 해주고 싶었던 거 아닐까. 나에게 있어 소풍날은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그날만큼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국민학교 시절 나는 엄마가 머리를 깍아주었다.>
"엄마가 깍아주고 2,000원씩 용돈 줄게~"
나는 그 말에 혹해서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다. 그 2,000원으론 문방구에서 간식거리를 사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던 간식은 신호등 사탕과 새콤달콤 포도맛과 만화책이 들어있던 껌이었다. 작고 조그만 만화책이 신기하기도 했고, 그 만화책을 모으고 싶어서 일부러 껌을 사기도 했다. 그 만화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기억속에만 있다. 어렸을 때의 물건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오즈의 마법사에서처럼 거대 토네이도가 나타나서 다 휩쓸어 간 것은 아닐까. 에머랄드시티로 전화를 걸어 볼까.
<크리스마스나 명절>에는 항상 과자 선물세트를 삼촌들에게서 선물로 받았다. 나는 그 시절 용돈보다도 더 그 선물이 좋았다. 평소 배를 곯지는 않았지만 과자같은 간식은 마음껏 사먹을수 없었다. 그렇다고 과자를 사달라고 떼를 써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과자 선물세트를 받을 때면 너무나도 행복했다. 지금은 마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온라인에서는 비슷한 꾸러미를 파는 걸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의 그 과자 맛은 아니겠지.
앗! 잊을 뻔 했다. 나에게는 이모가 두명 있는데, 엄마는 <큰이모>와 더 친했다. 나와 동생은 부모님과 여행이란 걸 그렇게 해본 적은 없지만 큰이모가 경주에 살아서 가끔 놀러 가곤 했다. 그때 엄마가 이모네 놀러가기 전에 예쁜 옷과 머리핀 그리고 구두를 사줬다. 나는 새옷을 입는 것도 좋았지만 이모네 가서 맛있는 것도 실컷 먹을 수 있고,(이모는 정말 요리실력이 좋았다.) 불국사와 첨성대 구경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큰이모는 우리가 돌아갈 때 도시락 통에 돈까스를 싸주었다. 요즘으로 치면 그냥 마트에서 산 냉동돈까스를 튀겨서 케찹을 뿌렸을 뿐인데, 터미널에서 출출할 때 먹었던 그 <돈까스 맛>은 어린시절 나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맛이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큰이모가 요즘 초콜릿 브랜드가 아닌 <초콜릿바>를 한박스 택배로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가 여름이었던지 엄마가 냉동실에 초콜릿바를 한가득 넣어놓고서 우리에게 하나씩 꺼내서 우리가 천장을 향해서 길게 뻗은 두손에 하나씩 얹어주고는 했다. 워낙 오래되어서 포장지가 잘 기억은 안나지만 유럽 느낌 그림이랄까? 그런 포장지에 은박지로 되어 있어서 위로 뿅하고 나오는 포장지였다. 요즘 같았으면 폰으로 인증이란 걸 해두었을 텐데 기억속에만 있다는게 쩝 좀 아쉽네.
<겨울방학>이면 나는 남동생과 동네 친구들과 같이 산으로 갔다. 손에는 비료푸대에 지푸라기를 담아서 갔다. 지푸라기가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엉덩이 충격방지 기능도 되어주고, 따뜻하기도 했다. 동네 언덕 윗 마을 오르막길로 가다보면 산으로 연결되는 오름(?)같은 곳이 나오는데 그곳이 경사도 적당하고 눈이 적당히 쌓여 있어서 썰매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바지고 잠바고 젖는 줄도 모르고 계속 반복해서 타고 또 탔는데, 여느 놀이기구와 비견될게 아니었다. 그 스릴감과 짜릿함이란!
<엄마가 올 동안>나는 주로 동네친구들이나 동생과 놀았다. 간식이나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않던 시절이라 엄마가 오기전에도 배가 고파서 불을 다룰 줄 몰랐던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스텐 그릇에 보리차를 붇고 나서 라면과 스프를 넣고서 불려먹는 것이었다. 뽀글이라고 하는 그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해서 먹은 거다. 한참을 불리고 나서 먹는 그 맛이란! 그러고 나서도 배가 고프면 김을 먹고나서 남은 부스러기와 소금을 찬밥에 비벼서 동생과 나눠 먹었다. 말하자면 소금빵이 아니라 '소금밥'이었던 것이다. 별거 아닌데도 어찌나 맛있던지. 지금은 더 풍족하게 사는데도 왜 공허함이 느껴질까? 그땐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말이다.
유년시절 아빠와 삼촌들의 불화와 잦은 다툼 그리고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의 관계에 늘 갈등이 대치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할머니가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토토로처럼 따뜻한 존재였고, 엄마와 아빠가 자주 다투었지만 또 그래도 평범하게 흘러가는 나날도 많은 그런 시절이었다. 나는 내가 시골에서 자라서 이렇게 풍부한 감수성을 가진 것과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가치관을 가지게 된 것에 늘 감사한다.
돌돌머리 핑거래빗의 유년시절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볼빨간 사춘기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