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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픈손가락 Jul 24. 2022

슬픔과 절망을 벗어나는 간단하고 심오한 방법

더 늦기 전에 다시 나는 책

미라클 모닝 이야기를 끝내고, 독서법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떠오른 말이 하나 있다. ‘세상만사 모두 한 마음먹기 나름이다.', 세상의 모든 빛을 감춘 칠흑 같은 어둠도, 눈부시도록 환한 때 아닌 그날의 밝음도 모두 제 한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다 내 안에서 비롯된다. 당신은 마음먹기에 따라 그곳에 머물 수도 있으며, 별힘 안들이고 바로 벗어날 수도 있다. 나는 슬픔과 절망을 벗어나는 이 간단하고 심오한 방법을 독서로부터 얻었다. 마치 운명처럼.


살면서 사람에겐 여러 번의 우여곡절과 고비가 찾아온다. 한 때는 왜 내게만 그것도 자주 찾아오는지 세상을 탓하고 원망했다. 내게 찾아온 모든 불행은 나를 둘러 싼 주변 사람들과 신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믿었으며, 그 모든 것들을 저주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모든 원인이 결국, 내 스스로 쌓아 올린 업보의 결과임을 깨닫기까지 난 절망했으며, 괴로웠고, 모든 화살의 방향을 억지로 돌리기에 바빴다. 콩은 콩 심은 데 나고, 팥은 팥 심은 데 난다. 행복의 끝에 불행이 찾아왔다면, 먼저 세상 탓하기 전에 지난 날 불행의 씨앗을 뿌린 당신을 탓해라. 만고의 진리는 행복의 씨앗에서 불행이 자라나는 법이 없다. 분명 내게 찾아온 연유가 있을 것이다.


절망과 비탄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그럼 당장 멈춰라. 그리고 잘못된 마음을 찾아서 바꿔라. 불행의 씨앗을 파종하는 마음의 손을 낚아 채 뿌리쳐라. 우린 그 씨앗이 장차 얼마나 무섭고 큰 나무로 자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막상 닥쳐서 두려움의 거대한 크기에 풀썩 주저앉지 않으려면 애초에 파종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한 생각이다. 책은 그런 조심성을 길러주는 몇 안 되는 아주 탁월한 도구다.


살기 위해 책을 읽으면, 책은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 반대로 죽고자 책을 읽으면 똑 같은 책의 똑 같은 문장속에 숨겨진 악마가 되살아나 가차없이 나를 죽음으로 이끈다. 글자와 문자의 형식을 빌려와 쓰인 부자가 되는 법과 희망을 얻는 법, 절망을 피하는 법 등은 책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지만 이미 당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들이다. 우린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진짜는 모두 당신 마음 안에 이미 있다. 부자가 되기 위한 마음으로 읽으면 책은 부자 되는 법을 보여주고,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읽으면, 어느 새 상처를 아물게 해준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노하우라도 읽는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천 가지 방법 모두가 공염불 소리로 들릴 뿐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다. 모든 것이 다 사람 한 마음먹기에 달렸다.


슬픔과 절망을 벗어나는 아주 간단하고도 심오한 방법


누구나 가까이에 시련을 끼고 산다. 다만 그 시련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우리가 모르는 것뿐이다. 슬픔과 절망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늘 곁에 가까이 있다. 이것들은 마치 바이러스와 같아서 어떤 이유로 우리가 약해지거나 비집고 들어올 틈만 주면 여지없이 찾아와 우릴 괴롭힌다.


사람마다 정해진 시련의 숫자가 있다면 좋으련만 우린 그걸 알 수도, 가늠할 수도 없다. 방심하면 다가오고, 제대로 대항해 싸워보겠다 날을 잔뜩 세우면 어찌 알았는지 안 온다. 그러다가 다시 스스로 안이 해져 잠깐 방심을 하면 여지없이 찾아와 주인 행세를 한다. 시련은 참 얄궂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공생하는 시련만큼 가까이 두는 게 또 하나 있다. 아시다시피 책이다. 많고 많은 것들 중에 왜 자꾸 유독 책이냐고 물으면 딱히 내어 놓을 답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지난 날에 가장 큰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 책이 있었고, 그 효과는 막강 했으며, 이후로 난 중독된 것처럼 책을 끊을 수 없게 됐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무언가에 의지해 잘 극복한 경험은 생각보다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때 느꼈던 좋고 행복한 감정은 느낌의 언어로 우리 무의식에 크게 각인되고, 이후 비슷한 상황에 처해졌을 때 되살아난다. 그래서일까 책은 필자에게 있어 분탕 된 삶을 진정시키는 안정제고, 흔하면서 가장 손쉽게 삶에 변화의 마법을 걸 수 있는 뾰로롱 지팡이다.


지금도 나는 그 마법같은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고 느끼던 내 인생의 마지막 그리고 막장, 난 녹초가 된 몸을 피할 곳 없어 찾아 든 열린 도서관에서 무공 비급 같은 마법의 책들을 만났다. 자신의 비급을 선뜻 빌려주는 무림의 고수는 없지만 이 마법의 책은 대출증만 쓰면 언제든지 빌려준다. 돈을 들여 산다고 해도 권당 1~2만원이면 충분하다. 2만원이 채 안 되는 돈과 그 마법을 읽을 눈, 책장을 넘길 손가락, 읽어 들이는데 투자할 단 몇 시간만 있으면 우린 심장 요동치는 엄청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생각보다 기적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채권자들을 피해 쫓겨 다녀야 하는 처지에 안정된 일자리는 욕심이었고, 하루 내게 주어진 24시간은 너무나 벅찼다. 그렇게 비록 내 첫 독서는 몸 피하기, 시간 때우기용이었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읽으니 오묘하게도 ‘생각‘이란게 생겼다. 활자만을 눈으로 쫓던 나의 어린 생각이 반복되는 읽기로 어른스러워지면서 활자를 쫓다가 남는 시간에 저자의 생각이 찾아드는 경험을 했다. 책을 읽으며 그저 지식과 정보를 쫓아 이해하기에도 바빴던 내가, 드디어 생각의 한 층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올라가 내 생각을 일으켜 저자의 생각을 내려다보는 상황까지 이른 것이다.


경험해보고 싶은가? 그럼 당장 책을 들어라. 미래의 계획을 그냥 세우나, 구체적으로 세우나, 세운 계획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마음이 움직였다면 일단 책부터 들고 봐라. 그게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가슴 속 ‘다짐’은 고기 잘게 다질때나 쓰는거다. 당신은 어떤가? 매년 해가 바뀔 때마다 달라져 보겠다고 숱한 다짐을 해놓고,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잘못을 매년 반복하고 있진 않은가 묻고 싶다.


딱 시계를 20년 전으로 되돌려 인생의 시련과 막막함 이란 높다란 벽을 마주한 다음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아 선 안 되겠다.’싶어 간절히 원하게 됐던 독서 얘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가슴 떨리고 슬픈 오늘의 이야기는 실제로 겪은 내 이야기다.


■ 인생 첫 번째의 날개


나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이 충만했던 부모님 밑에서 3명의 형제와 함께 자랐다. 지루할만큼 평범했다. 절약이 몸에 배인 부모님은 빚은 없었다. 이론대로 라면 윤택한 생활을 해야 했지만 8남매의 장남으로 종손으로 조실부모하고 동생들을 혼자 힘으로 키우느라 정말 가랑이가 찢어졌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그 맛을 안다고 중학교 시절 온 가족 5명이 삼겹살 집으로 외식을 나가면, 고기 3인분을 시키고, 공깃밥 5그릇을 시켜 먹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다. 한창 자랄 나이의 아이들 셋과 이미 성인인 부모님 둘이 시켜 먹는 것이 고작 고기 3인분이라니 아버지가 제법 실한 봉급을 받는 교육 공무원이었음에도 우린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훗날 되어 짐작건대 아마 봉급의 9할은 동생들 뒤치닥꺼리에 쓰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술도 안마시고 담배도 안피우는 아버지가 가장인 우리 가족이 그렇게 살았음을 설명할 이유가 생각나질 않는다.


그런 부모님을 지켜보며 자란 탓일까 월급쟁이로 산다는 것이 난 끔찍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에는 ‘직장인의 월급’은 ‘가난‘이란 말과 동의어란 등식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래서 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사업을 꿈꿨고, 직장을 다니며 제 몸 하나 건사할 정도의 돈을 모으자 그만두고 곧 바로 미련없이 장사를 시작했다.


모은 돈으로 시작한 첫 사업은 주택가 골목길 안 점포에 차린 컴퓨터 도소매점이었다. 젊은 패기와 의욕 때문이었을까 당시 막 유행이 시작되던 속도 빠른 인터넷을 설치하는 하청 용역까지 맡으며, 이른 나이에 제법 큰 돈을 벌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시련은 늘 그 정체를 감추고 우리 곁에 숨어 있었다. 당시 재벌 기업의 원청을 받아 하청을 주던 업체 대표가 설치 수수료 5개월 분을 들고 해외로 도주하는 사고가 생겼다. 그 바람에 나는 이전에 벌어 저축해뒀던 20억 가까운 돈을 끌러 고용하고 있던 설치 기사 수수료와 성과급을 지급해야 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통해 다음 단계로 나가려 했던 나는 한 순간에 무너졌고, 결산해보니 하청업으로 돈을 번 게 아니라 오히려 2억원의 빚을 지고 말았다. 원청자가 도망갔으니 받을 돈은 못 받고, 나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켰으니 줘야 할 돈이 있었다. 결국 중간에서 새우등이 툭 터진 꼴이었다.


■ 인생 두 번째의 날개


한 동안 집에서 꼼짝을 안했다. 세상만사가 모두 귀찮았다. 당시 나는 사람에 대한 배신감으로 무기력증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며,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를 퍼부었다. 어떤 책인지 정확히 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거실 책꽂이에 꼽혔던 것을 뽑아 펼치니 거기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흥하고 망하는 세상의 모든 결과는 아무리 부인하고, 회피하려 해도
당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당신에게는 두 번 다시 기회란 없다.
지금 거기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는 것도 당신 맘이고,
다시 툴툴 털고 일어나 또 한 번 해보는 것도 역시 당신 맘이다.
어떤 선택이든 결국은 당신 맘 대로다.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니 맘대로 해라!
작자 출처 미상


뒤통수가 망치로 얻어맞은 듯 욱신거렸다. 진짜 맞은 것도 아닌데 아팠고, 또 아픈 것처럼 진짜 눈물이 났다. 얼마나 넋을 놓고 울었을까, 며칠 전 잘 아는 후배가 뭐 하나 부탁할 것이 있다며 전화를 해왔던 일이 생각났다. 뭔 가에 이끌리듯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고, 다시 세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꺾여 접혔지만 아직 살아있음이 분명한 두 번째 날개를 펼쳤다. 다 펼쳐도 제 기능을 하기엔 아직 저리고 아픈 날개지만 가만히 어루만졌다.


천만 다행으로 다시 한번 펼친 사업은 세상도 내 편을 들어주었다. 부탁할 게 있다던 후배를 갖고 있던 재주로 돕다가 번뜩 눈을 떴다. 내가 지금 가장 잘하면서도 가장 가능성이 엿보이는 사업! PC방이었다. 컴퓨터 도소매를 했던 경험과 아프고 쓰리지만 인터넷망 설치에 대한 경험은 해당 사업에 빛을 발했다. 남들과 다른 경쟁력을 가졌으니 사업은 순조로웠다. 조그맣게 하던 것이 금방 프랜차이즈화 됐고, 나는 제법 큰 돈을 다시 벌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었다.


살만 해지니 분수를 모르는 건방이 하늘을 찔렀다. 멀쩡하던 사업을 큰 딸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울고 왔다고 접었다. 어쩜 그렇게 어리석을까. 자만이 하늘을 찔렀다. 무심코 던진 친구의 한 마디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온 아이를 보자 눈이 그냥 확 돌아버렸던 것이다. "너네 아빠 PC방 한다며? 엄마가 너 랑 놀지 말래~", 당시 PC방을 바라보는 학부모들의 시선이 그렇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그래도 난 너무 화가 났다.


그립던 딸아이를 어렵게 얻게 된 뒤부터 내 모든 삶의 중심은 단 하나였다. 나도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긴 것이다. 고심 끝에 난 아이와 연관된 새로운 패밀리 레스토랑 사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씨푸드 뷔페로 업그레이드하며, 사업은 계속 번창했고, 500평 규모 뷔페 사업을 6개까지 확장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도 잠시 믿고 있던 사람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사람이 무섭다. 그들의 손바닥 뒤집듯 쉽게 하는 말이, 신의라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 두렵다. 그렇게 믿고 찍은 잘못된 고장 하나 때문에 난 멀쩡하던 사업을 6개월 만에 동업자에게 빼앗겼다. 정말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수십억 원 대의 빚을 진 신용불량자가 되어 있었다. 가족은 삶의 터전을 잃고, 50평대 아파트에서 원룸으로 거처를 옮겼다. 비참하고 또 비참했다.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해 매일 술을 먹지 않고는 제정신으로 집에 들어가질 못했다. 맨 정신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족들을 대할 용기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 에야 알았다. 상대적으로 그게 행복이란 사실을, 아직 그 곳은 내가 겪을 최종 막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가 멀다 하고 연일 채권자들이 원룸으로 들이 닥쳤다. 그렇다고 내가 피하면 온갖 봉변은 아내가 당해야 했으니,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아내와 상의 끝에 원룸을 옮기고, 나는 당분간 타지로 떠나 있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 당분간이 햇수로 3년이 넘어갈 것이란 사실은 그땐 정말 꿈에도 알지 못했다.


■ 3년간 1,000권의 책을 읽다.


채권자를 피해 도망 다니는 일이란 뻔했다. 고정적인 일은 꿈도 못 꿨고, 날일이나 운 좋게 주어지는 보수 좋은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그때는 가족을 위한 생활비는커녕 제 몸 하나 건사하기조차 힘들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차츰 정책 사업 컨설팅이나 사업계획서 작성 같은 고부가가치 일을 하긴 했지만 처음엔 혼이 반쯤 나가 그럴 정신도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들과 말 한 마디 섞기가 힘들었다. 모르는 사이 나는 약간의 대인 기피증과 약간의 공황장애 같은 정신적인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갈 곳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집이 그리웠다. 하지만 나는 갈 수 없었고,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는 곳에 숨어 있고 싶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숨더라도 가급적 돈이 들지 않아야만 했다. 해당 조건을 충족하면서 시간도 때우기 좋은 곳은 없을까? 처음엔 PC방이 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카운터로 채권자가 나를 찾는 전화가 온 다음부터는 절대 안갔다. 그렇게 온갖 불안과 고민을 머릿속에 꼭 채운 채 길을 걷던 중 눈에 띈 곳이 바로 열린 도서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신의 계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 처지에 어쩜 그렇게 딱 맞는 곳이 그것도 마침 그 곳을 지날 때 내 눈 앞에 나타났을까. 그렇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 동아줄을 놓칠 새라 꽉 잡았다.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적막함, 이용요금은 몇 시간을 있어도 공짜, 먹거리의 환상적인 저렴함,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 줄 즐비한 책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그곳은 내게 참 많은 것들을 줬다.


처음부터 3년, 1,000권의 책읽기가 목표는 아니었다.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우울한 잡생각들을 떨칠 필요가 있었고, 나는 살기 위해 시계바늘을 휙휙 돌려 빨리 보내 버리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읽다가 뭔가 맞지 않고 지루해졌다고 느끼면, 다시 다른 책을, 또 다른 책을 계속 집어 들어 읽기를 계속했다.


어떤 관점에선 무의미한 독서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신 번쩍 들어 책 속에 박았던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은 뭔가 크게 달라져 있었다. 분명 어제와 같은 그 도서관이었고, 늘 같은 자리의 엇비슷한 시공간이었지만 뭔가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알았다. 아무것도 바뀔 게 없다고 믿는 절대적인 환경과 상황도 변한다는 것을, 모든 게 끝난 것으로 보이는 극한 상황 속 때 아닌 봉변을 당하고 있더라도 마음만 바꾸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분명 그곳은 같은 곳이었지만 중심이 되는 내가 바뀌었으니 이젠 나를 기준으로 이전과 같은 세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에! 수많은 철학자들이 했던 말이 이거였구나. 세상은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돌고, 세상의 중심에는 바로 내가 있다는 말의 참뜻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걸 깨닫고 난 후 나는 독서노트를 만들고 겉 표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3년, 1,000권 새삶 독서 프로젝트”, 그리고 바로 내달렸다. 또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다시 한번 확 바뀌어 있을 내 세상을 고대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시 책 속에 고개를 박았다. 나는 그렇게 내 인생의 고층 빌딩을 짓기 위한 튼튼한 토목 공사를 정성껏 3년간 했다. 층을 높이 더 높이 한껏 올리고 싶다면, 더욱 애써서 다지고 튼튼하게 읽어라. 잘 다져 둔 내 토목공사는 이번 빌딩 증축에도 별다른 이상 없이 대견하게 잘 버티고 있다.


나는 ‘임계점’이란 말을 즐겨 쓴다. 개념은 ‘양질 전환의 법칙’과도 비슷하다. 질적인 변화는 필요한 양만큼 채워질 때 비로소 생긴다는 뜻이다. 운동이나 어학공부, 요가와 달리기, 다이어트 같은 신체와 관련된 일은 물론이고, 오늘 강조하는 독서도 매한가지로 ‘양질 전환의 법칙’ 적용을 받는다. 양이 ‘임계점’을 넘어서면 비로소 질적인 변화가 생긴다. 누군가 물었다. 과연 1,000권의 책이 의미가 있냐고, 여러 명사들이 추천하는 좋은 책 몇 권을 1,000번쯤 반복해 읽는 게 더 낫지 않냐 고 물었다.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다. 자신이 뭘 얻고자 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고, 어떻게 읽으려는냐에 따라서도 다르다. 하지만 필자의 추천은 전자인 1,000권이다. 1,000번 말고, 1,000권! 왜냐고? 해보면 안다. 내가 아는 한 1,000번 보다 1,000권이 훨씬 쉽다. 책 한권을 10번쯤 읽어보면 안다. 사실 내공이 쌓인 실력자가 아니면 그리해서 1,000번을 채운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 실력자라면 이미 수천 권 이상의 책을 읽어낸 사람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하나 더, 나에게 '스스로'라는 말은 일종의 종교와 같다. 심지어 행복이란 말에도 '스스로'를 붙여 '스스로 찾는 행복'이란 표현을 즐겨 쓴다. 진짜 행복이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맞을 준비를 하고, 내가 발 벗고 나서 스스로 찾아야 하는 성질의 것이라는 말에 나는 격하게 공감한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려면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야 한다.


3년 1,000권 읽기 프로젝트를 다 마치고 나니 가슴속에 분명하게 하나 들어서는 것이 있었다. 바로 ‘생각’, ‘사고의 힘’이다. 책을 읽으면 지식과 정보가 쌓이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기억 정보를 연결하는 통로가 뻥 뚫린다. 한 번 뚫린 길이 갑자기 막히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이후 생긴 ‘사고의 힘’은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게 된다. 여기서 더 책을 애써 읽고, 목표로 한 1,000권에 다다르면, 앞서 이야기했던 ‘스스로’의 개념이 생겨난다. 왜 '스스로' 해야 하고, '스스로' 애써야 하며, '스스로'를 맹신하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이 깨달음은 향후 삶의 무한 에너지 동력원이 되어 당신을 당신이 원하는 훨씬 더 나은 세상으로 안내할 것이다.


과업의 성취도는 개인별로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비슷한 깨달음을 100권이 넘으며 느꼈다고 한다. 애석하지만 1,000권을 넘겼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도 봤다. 왜 안되냐고 화를 내지만 그 이유는 아마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나는 200권을 넘겼을 때 몇 가지 변화를 느꼈다. 그렇게 ‘생각’이란 실체가 들어선 후 앞으로 가야할 인생 길이 보였고, 이 깨달음을 계속 이어가면 다시는 길을 잃지 않으리 란 확신도 생겼다. 500권이 넘어서니 읽기에 가속도가 붙고, 삶을 객관화해 볼 수 있는 혜안도 생겼다. ‘스스로’에 대한 깨우침은 약 700권이 넘어선 후 생겼던 것 같다. 뭐랄까. 읽고 싶어 갈증이 생긴 몹시 기다리던 책을 간신히 구해 밀봉을 뜯고 펼쳐 읽는 듯한 느낌? 이후 700권에서 1,000권 달성은 굉장히 쉬웠다.


■ 지독하게 책을 읽으면 생기는 변화들


1.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하면서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다. 장담하건대, 처음부터 정말 제대로 애써 책을 읽으면, 100권 전후면 변화가 생긴다. 그럼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뭐 생각이 없는 거냐고 반발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말하는 ‘생각’이란 당신이 지금 말한 ‘생각’과 개념이 다르다. 그냥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지는 그 ‘생각’ 말고, 논리적 구조를 갖춘 ‘사고’라는 종류의 ‘생각’을 말하는 거다. 선배들이 말하는 좋은 책이란 일단 종이책으로 출간된 지식과 정보를 담은 것 중에서 논리적 구조를 잘 갖춘 것들이다. 이런 책을 100권쯤 읽으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논리 구조가 생기는데, 책으로 주산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비로소 머릿속에 주판이 들어서고, 이어 암산을 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분은 이걸 '생각의 틀'로 설명한다.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일종의 템플릿(틀)을 놓고 채워가는 식으로 글을 쓰면, 논리적이면서 안정된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다. 공감한다. 이 논리 구조의 틀이란 것이 글 쓸 데만 좋은 건 아니다. 논리 구조의 틀을 알면, 이에 맞춰 쓰인 책이나 글에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지식과 정보를 재빨리 찾아 낼 수 있다. 책을 읽을수록 책 읽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 남의 말을 듣는 재미가 생긴다.


읽기의 또 다른 방식은 '듣기'다. 제대로 읽을 줄 알면, 제대로 들을 수도 있다. 열심히 읽어 사고가 열리면, 드디어 남의 의견과 이야기를 듣는 귀도 함께 열린다. 깊게 읽어 본 사람만이 깊게 들을 수 있다. 반대로 깊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깊게 읽을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노력도 없이 깊게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긴 어렵다. 그러니까 깊게 읽는 법을 깨우친 후 깊게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이 바른 순서다.


그렇게 생각의 힘이라는 것이 생기면 사람은 매사에 진지해진다. 이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단 한 시라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해진다. 그러니 그런 마음이 일어난 후부터 인연이 된 사람과의 시간, 그들의 의견, 이야기가 콕콕 꽂히는 것이다. 경험으로 이때부터 ‘운’이란 것도 따라 생긴다. 누군가 당신의 이야기를 애정 어린 자세로 경청한다고 해보자. 어찌 그런 사람에게 뭐라도 하나 더 해주고 싶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당신도 팬이 생기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좋은 일들이 예기치 않게 일어난다. 마치 그동안 숨어 지내던 우렁각시가 적절한 시기에 나타나 딱 필요한 만큼의 좋은 일을 해주고 가는 느낌이 든다.


3. 속독법이요? 글쎄요.


책 읽기를 시작하고, 욕심이 생기면 조금 더 빨리 그리고 많이 읽고 싶어지는 게 사실이다. 이때 관심 가는 것이 바로 속독법이다. 설명에 두줄씩, 세줄씩 나중엔 한 페이지씩 읽는다고 하니 관심이 간다. 연습해서 글자가 적힌 부분에 집중하고 나머지 여백은 인지하지 않고 건너뛰면 더 빨라진다 등 아주 그럴듯해 보이는 이야기를 한다. 일명 '속독법'이다. 나도 많이 따라 해봤다.


내가 내린 지극히 주관적인 결론, 속독법은 거짓이다. 정보를 캐내기 위한 독서라면 모른다. 하지만 생각을 얻기 위한 독서라면 아니다. 거짓이다. 굳이 속독법을 들먹이지 않아도 앞서 말한 논리 구조에 익숙해지면 읽기는 무조건 빨라진다. 저자의 생각을 쫓아 읽는 것이니 단어 몇 개나 문장 한 두 줄만 봐도 뭘 주장하려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또 비슷한 주제인데 조금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을 보면, 이미 8할 정도는 다 아는 얘기라 요점만 파악해 읽으면 1시간안에 책 1권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속독? 그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다. 책에 따라, 담긴 내용에 따라, 얻고자 하는 가치에 따라 속도를 달리해서 알차게 읽으면 된다. 머리에 그리고 가슴에 남는 게 없는데, 빨리 또 많이 읽으면 뭣 할 건가. 빨리 많이 읽으려고만 하지 말고, 제대로 그리고 즐기면서 읽어라.


4. 삶이 변한다.


지금도 나는 가끔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진 절망과 신음의 심연속에 바짝 웅크리고 앉아 죽음만 생각했던 자신과 마주한다. 그때의 그 막막한 기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저절로 눈물이 난다. 나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뜻하지 않는 곳으로 방향 잡아 갈라치면 더 혹독한 위기와 시련을 줘 결국은 방향을 틀게 만들어 줬다. 신의 방법은 조금 못됐지만 결국은 나를 목표한 곳으로 이끈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한 걸음 걷기도 벅차서 걸음을 질질 끌며, 길게 늘어진 그림자의 무게에 숨 쉬는 것조차도 지겨웠던 날, 조금 못된 신은 난데없이 소나기를 퍼부었다. 내가 축 처져 걷는 꼴이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마침 그날 비를 피했던 곳이 왜 열린 도서관이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난 그것이 신의 치밀한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신도 내 처지가 이젠 행운 몇 번 쥐여주는 것으론 안되겠다 싶었나 보다. 탈무드의 교훈처럼 고기 몇 마리 말고, 아예 고기 낚는 법을 깨우쳐주려는 듯 말이다.


단순히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꾸준한 독서를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취해 이득을 얻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조금 거창하게 표현해 우리의 삶과 살아가는 방식, 생의 습관 자체를 완전히 교정한다. 그 누구보다 오밤중을 사랑했던 필자를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었고, 담배에 이어 술까지 끊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내 삶에 대해 진지해졌으며, 제대로 나 답게 사는 게 뭔지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갖는지 알게 해줬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이 순탄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여러가지 사건과 사고가 있을테고, 미처 겪어보지 못한 문제도 여럿 생길 것이다. 하지만 확신이 든다. 예전처럼 그리 맥없이 당하는 일은 이젠 없을 것이라 자신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매사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때 비로소 삶은 그에 화답해 변한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내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다. 나는 책을 빼놓고 그걸 설명할 자신이 없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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